면도날

서머싯 몸 지음 | 민음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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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09.6.30

페이지

529쪽

상세 정보

<인간의 굴레에서> <달과 6펜스>와 함께 서머싯 몸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로, 1930년대 유럽을 배경으로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한 젊은이의 구도적 여정을 그린다. 날카로운 면도날을 넘어서는 것처럼 고되고 험난한 구도의 길을 선택한 한 젊은이를 통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작품의 가장 중요한 축은 주인공 래리의 구도적 여정이다. 비록 어려서 부모를 잃었지만, 유복한 후견인 집안에서 부족할 것 없이 자란 래리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교회에도 나가고 골프도 즐기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사귀어 온 예쁜 여자 친구와의 결혼도 아무런 장애 없이 받아들일 만큼 그의 미래는 순탄해 보였다.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소박한 기대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로 래리의 삶은 보통 젊은이들과 다른 궤도에 들어선다. 부대에서 친해진 친구가 자신을 구해 주고, 눈앞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래리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론적 질문들에 사로잡힌다.

작품 속 시대는 1차 세계대전에서 시작하여 대공황기를 거쳐 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진다. 서머싯 몸은 이 시기의 사회적 혼돈을 소모적인 허무주의나 현실 도피로 연결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허영과 불안에 주목하기보다 래리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몰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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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상태:카뮈)

@smlee682

“날카로운 면도날의 날을 넘기는 어렵다. 그와 같이 현자는 구원의 길도 어렵다고 말한다.”

우파니샤드에서 가져온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이게 래리 한 사람의 구도 여정을 가리키는 말인 줄 알았다. 전쟁 이후 삶의 의미를 잃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길에서 벗어나 답을 찾아 떠도는 한 사람의 이야기.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다시 이 문장으로 돌아오니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이 소설에서 면도날 위를 걷고 있는 사람은 래리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저마다 자기만의 날 위에 서 있었다.

래리는 전쟁에서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안정된 직업과 약혼, 사교계와 부유한 생활처럼 이미 준비되어 있던 미래를 두고 유럽과 인도를 떠돈다. 삶은 무엇인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정말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다. 그래서 래리의 여정만 놓고 보면 ‘면도날’은 세속과 초월 사이의 좁고 위태로운 경계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이자벨을 보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이자벨은 래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원하는 삶까지 함께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래리와 함께한다는 건 자신이 익숙하게 누리던 안락함과 풍요, 사회적 지위와 미래를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이자벨은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그런 선택이 속물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은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가기 위해 자신이 원하던 삶의 모습까지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 역시 정말 자신에게 진실한 선택일까.

이자벨에게도 분명 자기만의 면도날이 있었다. 사랑과 안정, 진심과 욕망 사이에 놓인 아주 좁은 경계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위에서 오래 흔들리다가 결국 안정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래리가 정신적인 면도날 위를 걸었다면, 이자벨은 감정적인 면도날 위를 걸었던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다른 인물들의 삶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레이는 사업 실패 이후 무너진 현실과 자신이 지켜온 자존심 사이에서 버티고, 소피는 견디기 힘든 상실과 자기 파괴 사이에서 계속 흔들린다. 그들의 삶은 래리의 구도만큼 거창하거나 숭고해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그들에게 그 경계가 덜 위태로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말하는 ‘면도날’을 꼭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만 읽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계속 자기만의 면도날 위에 올라선다. 소유와 자유 사이에서, 안정과 진심 사이에서, 체면과 욕망 사이에서, 사랑과 자존심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면 편해질 것 같으면서도, 우리는 이상할 만큼 그 경계 위에서 오래 망설인다.

래리의 면도날만 유난히 특별해 보이는 건 그것이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직업을 버리고 인도로 떠나는 일이 면도날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놓아주는 일이 그보다 더 어렵고 날카로운 길일 수도 있다.

서술자로 등장하는 서머싯 몸의 위치도 흥미로웠다. 그는 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지 않는다. 어떤 삶이 옳다고 말하지도 않고, 누구의 선택을 대신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나는 이 거리감이 이 소설과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면도날 위에 실제로 서 있는 사람은 당장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밑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떤 길 위에 있는지, 왜 흔들리고 있는지조차 그 순간에는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그 위태로움을 더 잘 알아보는 건 한 발 떨어져 바라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몸은 그래서 답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저마다 어떤 날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지를 지켜보는 사람으로 남는다.

그리고 어쩌면 소설을 읽는 일도 비슷한 것 같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해결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경계 위에 서 있는지를 잠깐 돌아보게 하는 것.

책을 덮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내가 지금 어떤 면도날 위에 서 있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갈림길이라고 말한다. 이 길이냐 저 길이냐, 둘 중 하나를 고르면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의 삶은 그렇게 넓고 분명한 두 갈래 길보다는 면도날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조금만 기울어도 다른 무언가를 잃게 되는 좁은 경계.

안정을 택하면 진심을 버린 것 같고, 진심을 따라가면 삶의 기반을 잃을 것 같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자유를 조금 내어주어야 하고, 자유를 지키려 하면 때로 누군가를 놓쳐야 한다. 결국 우리는 하나를 선택하면서 동시에 다른 하나의 일부를 잃어가며 살아간다.

래리처럼 그 날을 끝까지 건너 자기만의 답에 도달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닿지 못한 채 계속 흔들리고, 때로는 뒤로 물러나고, 가끔은 발을 베이면서도 다시 걷는다.

예전에는 그런 흔들림을 우유부단함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면도날>을 읽고 나서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어쩌면 흔들린다는 건 아직 양쪽을 모두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사랑도 놓치고 싶지 않고 나 자신도 잃고 싶지 않아서, 안정도 필요하지만 진심까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서.

삶에서 완벽한 균형을 찾는 건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무엇과 무엇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지를 아는 일 아닐까.

어쩌면 삶은 면도날을 완벽하게 건너는 일이 아니라, 그 위에서 계속 균형을 잃고 또 되찾으면서 앞으로 가는 일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면도날

서머싯 몸 지음
민음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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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

@wjo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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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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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 지음
민음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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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에서> <달과 6펜스>와 함께 서머싯 몸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로, 1930년대 유럽을 배경으로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한 젊은이의 구도적 여정을 그린다. 날카로운 면도날을 넘어서는 것처럼 고되고 험난한 구도의 길을 선택한 한 젊은이를 통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작품의 가장 중요한 축은 주인공 래리의 구도적 여정이다. 비록 어려서 부모를 잃었지만, 유복한 후견인 집안에서 부족할 것 없이 자란 래리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교회에도 나가고 골프도 즐기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사귀어 온 예쁜 여자 친구와의 결혼도 아무런 장애 없이 받아들일 만큼 그의 미래는 순탄해 보였다.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소박한 기대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로 래리의 삶은 보통 젊은이들과 다른 궤도에 들어선다. 부대에서 친해진 친구가 자신을 구해 주고, 눈앞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래리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론적 질문들에 사로잡힌다.

작품 속 시대는 1차 세계대전에서 시작하여 대공황기를 거쳐 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진다. 서머싯 몸은 이 시기의 사회적 혼돈을 소모적인 허무주의나 현실 도피로 연결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허영과 불안에 주목하기보다 래리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몰입한다.

출판사 책 소개

<인간의 굴레에서>, <달과 6펜스>와 함께
서머싯 몸의 3대 장편소설 중 하나
비정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바치는 작품
평범한 삶의 위대함, 그 위대함을 넘어서는 고귀한 여정


“몸은 위대한 예술가다. 그는 천재다.” ― 시어도어 드라이저
“보기 드물게 뛰어난 몸의 스토리텔링 능력은 상상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선데이 타임스》
“이 시대의 정직한 작가라면 서머싯 몸의 작품에 도저히 무관심한 척할 수가 없다. 몸은 작가로서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고어 비달

서머싯 몸의 장편소설 <면도날>은 1930년대 유럽, 그 풍요와 야망의 시대를 배경으로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한 젊은이의 구도적 여정을 그린다.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에서>와 함께 서머싯 몸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아 온 <면도날>은 날카로운 면도날을 넘어서는 것처럼 고되고 험난한 구도의 길을 선택한 한 젊은이를 통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몸은 ‘구원’이라는 다소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 특유의 명쾌하고 간결한 문체와 유머를 잃지 않아, ‘소설은 재미를 위한 것’이라는 자신의 문학관을 이 작품에서도 성공적으로 보여 준다. 치밀한 구성으로 주인공 래리뿐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이 발산하는 젊음의 색깔들을 고르게 펼치는 <면도날>은 이 시대의 움츠러든 청춘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진중한 화두를 던진다.

■ 대중이 사랑한 20세기 작가 서머싯 몸

서머싯 몸은 자전적 회상록 <요약(The Summing Up)>에서 “나는 20대에는 비평가들의 잔인한 평을 받았으며, 30대에는 건방지다는 평을, 40대에는 냉소적이라는 평을, 50대에는 유능하다는 평을, 그리고 60대에는 천박하다는 평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많은 작품이 사랑받았고, 말년에는 명예 훈위, 문학 훈위 칭호까지 받은 작가에 대한 평가치곤 가혹하게 느껴지지만, 이 고백이 작가의 엄살만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생전에 비평가들에게 외면당한 작가였고, 그 명성에 비해 작품에 대한 진지한 연구는 아직까지도 의외로 적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몸은 많은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 통찰과 발견을 제공한 20세기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91세까지 사는 동안 장편소설 20편, 희곡 25편, 여행기와 평론집 11편, 단편소설 100편을 완성해 “정력의 작가”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성실하게 작품 활동을 했는데, 문학을 향한 그의 높은 열정은 당대의 대중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따라서 몸의 표현을 빗대어 그를 다시 소개하자면, 그는 살아서는 대중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고, 죽어서는 불멸의 고전으로 기억되는 거장이 되었다. 특히 그의 몇몇 장편은 날카로운 관찰력과 생생한 인물 묘사를 바탕으로 심오한 세계를 창조해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그중 하나가 뒤늦게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소개되는 <면도날>이다.

■ 평범한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가치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축은 주인공 래리의 구도적 여정이다. 비록 어려서 부모를 잃었지만, 유복한 후견인 집안에서 부족할 것 없이 자란 래리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교회에도 나가고 골프도 즐기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사귀어 온 예쁜 여자 친구와의 결혼도 아무런 장애 없이 받아들일 만큼 그의 미래는 순탄해 보였다.
하지만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소박한 기대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로 래리의 삶은 보통의 젊은이들과는 다른 궤도에 들어선다. 부대에서 친해진 쾌활한 친구가 교전 중에 자신을 구해 주고는, 눈앞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삶의 날카로운 일면을 경험한 그는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론적 질문들에 사로잡힌다.

“나는 순간, 직감이랄까, 이 청년의 내면에서 어떤 혼란스러운 갈등이 요동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갈등이 어느 정도 깊은 생각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막연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지만, 혼란과 불안감에 사로잡혀서 어딘지도 모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래리는 안정된 직장과 결혼을 앞둔 약혼녀, 평범하게 상류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버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답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그 구도의 여정은 프랑스의 탄광과 수도원, 독일의 농장,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곳곳을 돌아 마침내 인도의 아슈라마에까지 이른다.
이 작품 속 시대는 1차 세계대전에서 시작하여 대공황기를 거쳐 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진다. 여러 굵직한 사건들로 인해 전통적 가치가 붕괴되고 새로운 가치는 미처 성숙하지 못한 사회적 혼란기이다. 하지만 <면도날>은 이 혼돈을 소모적인 허무주의나 현실 도피로 연결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허영과 불안에 주목하기보다 래리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몰입한다.
소설 속 래리의 구원은 동양적 세계관과 닿아 있다. 래리는 로이스부르크 같은 신비주의자의 책을 탐독하고, 개개인의 영성적 변화에서 구원을 찾으며, 방랑자적인 면모를 풍긴다. 이것은 서머싯 몸 자신의 관심과도 일치한다. 실제로 몸은 젊은 시절 인도 여행을 통해서 많은 철학적 영감과 얻었으며, 그 경험을 이 소설에서 생생하게 녹여 낸다.

■ 세속적 삶 속에 숨겨진 성스러운 씨앗

한편 래리의 약혼녀 이사벨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래리와 전혀 다른 결단을 내린다. 어려서부터 한동네에서 함께 자라서 래리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는 이사벨이지만, 전쟁에서 돌아온 래리가 예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져 불안해한다. 결혼은커녕 취직할 의지도 없이 “빈둥거리는” 래리를 보다 못한 이사벨은 파리에 가서 2년간 원하는 공부를 실컷 하고 돌아오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약속한 2년이 다 흐르도록 래리가 “바보 같은 소리”만 늘어놓자 미련 없이 그를 포기한다.

“하지만 래리, 그거 알아? 당신은 나한테 맞지도 않는 삶을 요구하고 있어. 내가 관심도 없고, 또 관심을 갖고 싶지도 않은 삶 말이야. 난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 난 이제 겨우 스무 살이야. 10년 후면 늙어 버릴 거고, 지금 시간이 있을 때 삶을 즐기고 싶어. 아, 래리, 난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삶은 시시해.”

사랑 대신 안정되고 화려한 생활을 선택한 이사벨은 래리의 친구이자 재벌 2세인 그레이와 결혼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사벨을 단순히 악녀로만 묘사하진 않는다. 오히려 순수하고 욕망에 솔직한 사랑스러운 여성으로 그린다. 그녀뿐만 아니라 무리한 고집으로 사업을 벌이다 대공황 때 빈털터리가 된 그레이나, 남편과 아이를 잃고 미쳐 버린 소피, 몽마르트르 화가들의 첩으로 살아가는 닳고 닳은 수잔, 파리 사교계의 지독한 속물 엘리엇마저도 작가는 “사랑할 만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몸은 여러 가지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이 시대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치들을 아름답게 진열한다. 결국 그것이 개인적인 행복이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면도날>의 인물들은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것에 당당하고, 그것을 위해 성실하게 노력한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세속적 삶 속에 숨어 있는 성스러움의 씨앗을 볼 수 있다. 세속적 삶과 가장 동떨어진 래리조차도, 긴 여행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현실과의 접점을 만들어 나간다. 이로써 작가는 시끌벅적하고 서로 부대끼는 구체적인 현실이 마냥 천박하고 비루한 것이 아니라 성스러움을 구현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 이야기 안팎을 오가며 펼쳐지는 생생한 입담

이 책의 독특함 중 하나는 작가 자신이 소설 속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화자이자 작품 속 조연인 ‘서머싯 몸’은 때론 인물들의 가까운 이웃으로, 때론 몇 년 동안 연락이 닿지 않는 옛 친구로 그들의 삶을 전해 준다. 소설 속 서머싯 몸은 명백히 가공된 인물이지만 작가라는 직업과 이름이 똑같을 뿐 아니라, 취미, 버릇, 성격 등 실제 자신을 모델로 실감나는 이야기를 창조한다. 또한 이러한 참신한 설정을 활용해, 작가는 이야기 밖에서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지금껏 이렇게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이 글을 소설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단지 마땅히 붙일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줄거리다운 줄거리도 별로 없고 결말이 죽음이나 결혼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말년의 몸은 여전히 독설가이고, 냉소적인 개인주의자이지만, 동시에 타인의 이기심에 관대하고, 아집을 포용하는 어른의 태도를 보여 준다. 작가는 <면도날>을 통해, 방황하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열성적인 후원자는 아닐지라도,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 따뜻한 온기를 전한다.
<면도날>은 세상이 정해 놓은 레일을 뛰어 넘은 래리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 준다. 누구에게나 잠재하는 숭고함의 씨앗은, 삶을 통해서 증명될 때 비로소 명징한 빛을 밝힐 수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동시에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숭고함을 절대시하기보다, 가치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긴 채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의 삶에서 감동과 공감을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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