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가치를 이끄는 게 아니라 가치가 기술을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가치란 대체 뭘까?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모른다."(336)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모른다"는 문장이 보여 주듯이, 기술을 이끌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저자 장강명도 놀라울 정도로 모르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복적으로 책에서 자신의 막연한 직관에 의존하는 어떤 가치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 하나를 살펴 보자.
"내가 주체가 아니라 보조 인력이라고 느낀다면 나는 '내 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내 글쓰기가 막힐 때마다 인공지능이 기가 막힌 조언을 해준다면 나는 소설 쓰기에서 도전을 할 수 없게 되고, 더 이상 흥분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온 소설을 '내 것'이라고 여기지도 못할 것이다. 거대한 의미의 흐름에 참여한다고 느끼지도 못할 것이고, 거기에 헌신할 수 있겠다는 믿음도 잃어버린다."(224)
소설가 장강명이 '내 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 좌절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이것은 장강명에게 문제적인 상황이다. 읽을 만한 소설을 찾으려 서점을 뒤적이는 독자 김명환에게 장강명의 비참함이 어째서 문제가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소설가의 자의식이 떨어지면 좋은 소설을 집필할 동기가 떨어지고, 이것이 좋은 소설을 읽고픈 독자들과 출판업계 종사자들에 해악이 된다고 장강명은 주장하고 싶은 것일까? 그런데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독자의 기대를 충족할 수 있다면, 출판계가 경험할 해악은 어떤 종류의 해악이란 말인가?
여기서 내가 단지 '소설가 일은 소설가가 해결하세요'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장강명이 이 대목 이후에 따로 지적하듯이, '가치 있는 노동에서 소외되는 경험'은 다른 노동자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 개인이 어떤 노동에 대해 '가치 있다'고 느끼느냐와, 그 노동이 실제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느냐는 같은 질문이 아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살인청부업자의 무너지는 자긍심 같은 것은 우리가 신경 써 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장강명의 소외가 '주목받을 만한 소외'가 되려면, 그가 잃은 '가치'가 무엇인지를 먼저 탐문해야만 한다.
"굉장히 멋진 작품을 쓰는 인공지능을 내가 동료 작가로 여길 수 있을까? 인공지능 몇 대가 그런 작품을 1년에 한 편 정도 펴낸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5분에 한 편씩 그런 수준의 장편소설 원고를 쏟아 낸다면? 그래서 하루에 단행본 분량의 작품을 288편씩, 1년에 10만 5120편을 발표한다면? 그런 인공지능이 전 세계 모든 스마트폰에 두세 종류씩 설치된다면? […] 아무리 큰 감동을 주며 문학적 완성도가 뛰어난 글이라 하더라도 매일 새로운 작품이 5분에 한 편씩 나온다면, 사람들은 그런 작품들의 존재를 특별하지 않게 여기지 않을까?"(14-16)
위 인용구의 마지막 문장이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인공지능이 '너무 많은 걸작'들을 단기간에 생산해 내면, '위대한 문학작품'에서 독자들이 느낄 감흥도 시들해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음, 이건 확실히 장강명 개인의 문제를 뛰어넘는다. 그러나 "큰 감동을 주며 문학적 완성도가 뛰어난" 단행본 분량의 작품을 인공지능이 어떻게 하루에 288편씩 쏟아낼 수 있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장강명이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대문호의 정전을 떠올리며 저런 말을 한 것이라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같은 책을 하루에 288편씩 쏟아내는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상용화하려는 기업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만약 장강명이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인 J. K. 롤링을 떠올리며 저런 말을 한 것이라면, 해리 포터 류의 판타지 레퍼런스를 참조한 '양산형' 소설들이 어떤 관점에서 '위대한 문학'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아마 장강명의 의도는 전자에 가까워 보이므로, 막대한 투자금을 영업이익으로 보상받으리라고 믿는 또는 열정적인 문학 애호가인 대표가 운영하는 기업이 등장했다고 치자. 이 기업이 개발한 인공지능은 세계 유수의 '위대한 작품'들을 학습했으며, 그 학습을 바탕으로 표절 없이도 명작의 원리를 구현하는 288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두 가지의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다. 첫째, 오직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비롯한 명작 원전들만이 위대하며, 인공지능이 만든 288편은 그에 준하는 감동을 줄 수 없다. 둘째, 인공지능의 작품도 충분히 문학적 완성도를 갖추고 감동을 줄 수 있으며, 그 순간 '위대함'에 함의된 희소성이 사라지므로 그 작품들은 더 이상 '위대하다'고 부르기 어렵게 된다.
책을 보건대 장강명의 직관은 후자에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도 나처럼 발터 벤야민의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아는 것 같으므로, 그가 지키고 싶어 하는 '위대함'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이 세상에 단 한 점뿐인 그림이라는 이유로 갖던 예술작품의 아우라Aura는 전세계의 상영관에 얼마든지 복제 가능한 영화의 등장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는 '위대한 영화' 목록을 추리기 위해 고전적인 아우라 개념을 부활시키려고는 하지 않는다. 물론 완성된 작품을 복제하는 것과 창작 원리를 복제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서 주로 추락하는 것은 작가의 권위이지 독자의 감동이 아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준하는 작품이 288편이면 독자가 '이 중 아무 책'이나 골라 잡을 수 있으므로 '명작'의 의미가 가벼워지거나 퇴색될 것 같지만, 그렇게 골라 잡은 책 한 권을 치열하게 통과해 나가는 경험이 '명작에서 얻는 감동'의 조건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꼭 도스토예프스키여야 한다, 꼭 장강명의 책이어야 한다'라는 브랜드 파워가 훼손됐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장강명이 걱정하는 것은, '나의 브랜드 파워가 떨어졌다는 인식에서 오는 가치의 상실'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으며, 그가 '브랜드 파워'라는 용어를 그다지 좋아할 것 같지도 않다. 그는 알파고의 등장이 바둑계에 가한 충격파 중 하나로 탁월한 실력과 감동적인 서사 양축 사이의 무게중심 변화를 꼽았다. AI를 대국으로 이길 수 없는 인간 프로기사가 대중에게 어필할 매력은 '인간적인 대결'에서 오는 '맛'이라는 것이다. 인플루언서와 팬덤 비즈니스가 도입된 스포츠계의 현황은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스타덤에 오른 사격 국가대표 김예지 선수의 사례로 더 잘 설명된다. 김예지가 은메달을 딴 종목에서,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딴 오예진 선수는 "외모나 표정, 옷차림, 사격 포즈가 김예지 선수처럼 '쿨'해 보이지 않았고, 스타덤에 오르지 못했다."(258) 예술계도 마찬가지다. "노래 실력이 대중을 납득시킬 정도만 되면 그다음에는 전문 작가나 퍼스널 이미지 컨설팅업체와 계약해 개인 사연을 개발하는 게 더 효과적인 성공 전략인 것 아닐까?"(250)
이런 문제 제기에는 무슨 함축이 있을까? 사격 실력이 더 좋은 오예진이 김예지를 뛰어넘는 스타가 되었어야 한다는 정도의 발상은 아닐 것이다. '오예진의 탁월함은 금메달이라는 보상을 받았지만, 은메달리스트인 김예지 선수는 사격에서 '부차적' 요소에 해당하는 '쿨한 이미지' 때문에 더 큰 주목을 받았고 어쩌면 더 많은 돈을 벌었을지도 모르는데, 여기에는 무언가 전도가 있다.' 장강명의 견해는 이 정도로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김예지의 '스타성'은 왜 부차적인 것이 되는가? '스타성'이 '사격 실력'을 견인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격 실력'이 '스타성'을 견인하는 것도 아니다. 이 두 가지 사실 중 전자가 더 중요해지는 이유로서 떠올릴 수 있는 간단한 답변은, 오예진과 김예지가 공연한 무대가 사격 대결을 펼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대가 왜 사격장이어야 하는 것인지, 사격 경기의 중계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는 크게 의문시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이 스포츠를 즐기는 이유는 게임에 내재한 서사성 내지 가치 체계에 있다. 가위바위보는 확률에 의존하는 단발성 게임이므로 서사도 없고, 운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인간의 가치 체계와 부합하지 않으므로 감동도 없다. 이와 달리 여러 스포츠 종목이 존속해 온 것은, 가치 내지 재미있는 서사의 체험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와 그에 부응하는 기업 및 정부 기관 등의 후원이 '바로 이 종목'이라는 형식을 향한 결과이다. 그리고 '바로 이 종목'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어떤 사람들은 마치 '바로 이 종목' 자체가 종목의 생명력과 정당성의 근원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격 대결을 '누가 더 총을 잘 쏘는지를 검증하는 도구'로 정의한다면 많은 사격 관련자가 이를 사격이 갖는 의미의 축소 내지 격하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도 말이다. 사격 경기를 보는 제각각의 관객도 그렇다. '사격'이라는 형식을 채택한 경기에 입장한 이상 출전자들의 사격 성적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보는 것이 주요한 재미지만, 주최 측이 관객에게 '오직 총 쏘는 실력에만 집중하세요'라고 요구할 권리나 유인은 없다. ('그럴 거면 안 볼게요'라고 말하는 관객들은 떠나고, '승패 애호가'들만 객석에 앉거나 시청률을 높여 주기를 바라는가?)
김예지는 스포츠 경기의 관객들이 감응할 만한 '포즈'를 보여 주었으며 그것이 그의 '스타성'이 되었다. 장강명이 '금메달보다 주목받는 은메달' 현상에 '능력주의 신화'로 오염되지 않은 이의를 제기하려면, '업계에서의 실력'이 '스타성'을 상회할 만한 어떤 가치를 이 세계에 제공하는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예상 가능한 장강명의 답변은, '스타성'의 가치 상승은 어떤 종류의 진지함, 성실함, 치열함에 대한 존중 의식을 약화하리라는 것이다.
"지난해 내가 사생활에 해당하는 포스팅을 페이스북에 올린 적은 딱 두 번이다. […] 그 두 건의 포스팅은 평소 내가 올린 홍보 게시물보다 훨씬 많은 '좋아요'를 얻었고 댓글도 많이 달렸다. 다른 이용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 하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올리고 싶지 않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사생활을 공개하고 친구인 양 굴기 싫다. 그래야 팔로워가 늘고, 내가 SNS를 하는 근본적인 이유인 책 홍보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 거부감이 오히려 더 커진다. 나 자신을 파는 기분이 든다."(266)
8장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장강명은 사격계와 바둑계에 대한 서술에 뒤이어 소설가로서 자신이 처한 곤경을 이야기한다. 그가 팔고 싶은 것은 자신의 책이지 사생활이 아니다. 얼핏 개인적인 고민 이야기로 보일 수 있는 대목이지만, 직전의 맥락과 인용구의 마지막 문장 때문에 이 글은 일종의 '가치론적 (또는 사회학적) 불만'으로 읽힌다. 만약 그렇다면, 나도 그의 가치론적 불만에 가치론적 불만이 있다. 왜 우리가 당신의 사생활과 재치 있는 문장보다 당신의 책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왜 후자가 전자보다 더 가치 있는 것입니까? 만약 인기 작가가 이 물음에 '내 책에는 나만의 농익은 고민, 내가 웅숭깊게 갈고닦으려 공 들인 사유와 문장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만 답한다면, 솔직히 다소 기만적으로 들릴 것 같다. 그런 답변은 실력 없는 무명 작가도 할 수 있으므로, 결국 '장강명에게는 탁월한 무언가가 있다'고 전제하지 않기 어렵다. 여기서 그 탁월함이 무엇을 위한 탁월함이냐는 물음이 다시 제기된다. 만약 그의 탁월함이 현대인의 삶과 현대 사회에 대한 통찰력에 있다면, 예비 독자들은 그가 그런 통찰력을 갖춘 사람임을 책을 읽기 전에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통찰력은 그가 SNS에 올리는 일상 게시글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능력인 걸까?
장강명은 그의 '책과 무관한' 글이 더 많은 '좋아요'를 받은 이유가, 사람들이 책보다 사생활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현상은 희소성과 관련이 있다. 만약 그가 평소에 재치 있는 생활 포스팅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던 사람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진정으로 통찰력 있는 장문의 글을 올렸을 때 '이 사람이 이런 면도 있었어?' 같은 종류의 호응을 제법 얻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책 자체를 싫어했다기보다 단지 작가가 SNS에 자기 책을 홍보하는 게시글은 뻔하다고 (다시 말해, 나에게 주는 가치가 미미하다고) 생각했을 뿐일 수 있다. 조금 더 의미 부여를 하자면, 사람들은 상아탑에서 고고한 사유를 하거나 서재에서 접신한 듯 글을 휘갈기는 '지식인/예술가'가 '우리'가 속한 조금 더 '세속적인' 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을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런 장면은 단순히 '저들'을 '나'와 같은 위치로 '끌어내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소설'로는 충족되지 않던 어떤 빈자리를 채워 주었기 때문에 호응을 얻었을 것이다. 시대와 호흡하려는 소설가에게 모종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면, 책 홍보보다 소설가의 캔맥주 사진이 더 잘 채울 수 있는 그 빈자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묻는 게 바로 그런 역할 중 하나 아닐까?
내가 장강명의 문제의식에 반대하는 것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오히려 대부분은 동의한다고 답할 것이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장강명이 자신의 문제의식을 극단적인 의심으로 몰아붙이는 대신 직관에 의존하여 지지하는 편리한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사유가 불충분하기 때문이 아니라 덜 유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장강명의 기술 비판은 여러 대목에서 전형적인 인문주의의 언어에 기댔으며, 이는 기술낙관론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적절한 번역어의 다리 대신 더 깊은 심연, 더 큰 간극이 생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인공지능이 팔 수 없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지적을 되짚어 보자. 여기서 장강명은 인플루언서와 팬덤 비즈니스로 위시되는 '자기PR의 시대'를 정보 비대칭에 기인한 비효율의 범람기로 틀 지어 볼 수도 있었다. 위대한 문학 작품이 매일 288편씩 쏟아지고 위대하지 않은 텍스트는 더 많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떤 책을 선택해야 좋을지 알지 못한다. 출판사들은 책의 매력을 설파하기 위해 마케팅과 작가 브랜딩에 의존한다. 자본이 많을수록 고지를 점하기도 유리해진다. 작가가 독자에게 감동을 줄 책을 쓸 수 있는 시간 중 일부를 떼어내어 '제가 여러분께 감동을 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어필하고, 그만큼 독자가 얻는 감동도 줄어드는 일종의 시장 실패가 발생한다. 그러나 장강명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정재승의 추천사가 잘 요약했듯, 그는 "어떤 자부심이 무너질 때의 울림, 자신의 세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는 밤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들려 주었다. '어떤 자부심', '유효해야 하는 세계'가 있는 이들이라야 그의 전언에 감응할 수 있는 구조다. 아래의 문제 제기는 그런 점에서 문제적이다.
"자율주행차는 운전으로 밥벌이를 하는 수많은 운수업 종사자의 생계를 위협한다. 철도 기관사나 선박 운항사, 항공기 조종사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전 세계 택시 기사, 대리운전 기사, 버스 기사, 화물차 기사, 특수차량 기사의 수가 과연 얼마나 될까? 수백만 명? 수천만 명? 자율주행차가 보급되면 운수업 종사자들이 크리스퍼 전문가나 오보에 연주자로 전업할 수 있을까? 이들과 그 가족들의 운명이 테슬라나 구글 같은 몇몇 테크 기업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나는 믿어지지 않는다."(324-325)
타당하고 시의적인 지적이며, 장강명을 '멋모르는 인문주의자'로 모독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보여 주는 단락이기도 하다. 그런데 장강명은 바둑과 소설을 주제로 반복적이다시피 '인간성'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책의 마지막인 10장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일자리 문제를 제기한다. 나는 그가 앞서 인공지능 소설가의 등장이 낳을 '명작의 과포화' 현상, 소설가의 가치 소외, 탁월한 실력과 스타성의 위계 전도 같은 문제를 다루어 왔음을 기억하고 있다. 반면 "철도 기관사나 선박 운항사, 항공기 조종사"라는 구체적인 직업군에 인공지능이 가하는 위협으로 유일하게 지목되는 것은 "밥벌이" 즉 "생계"의 상실이다. 이런 이원적 문제 제기는 무엇을 함축하는가?
이것도 지적하고, 저것도 지적하는 것은 비판할 일이 아니다. 다만 장강명은 앞에서 소설가가 처한 곤경을 "평범한 인간들이 가치를 잃어버리고, 가치로부터 소외되는"(225) AI 시대에 대한 징후로 확장했었다. '평범한 인간들' 중에는 철도 기관사나 선박 운항사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의 등장이 이들로 하여금 '내가 내 일의 주인'이라는 의식의 약화와 그로 인한 '소외'를 야기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내비게이션에 의존하는 택시 기사들이 '예전에는 내가 주체적으로 운전했는데, 지금은 내비게이션의 명령을 따르는 보조 인력이 된 것 같아 자긍심이 떨어졌다'고 느끼는지를 우리는 얼마나 궁금해하고 있(었)을까?
문제는, 인공지능이 나타나기 전에도 '내가 내 일의 주인'이라는 느낌, '내 일이 갖는 가치'에서 기인하는 자긍심이라는 효용은 몇몇 직업군 또는 개인이 특권적으로 누리던 것이었는데, 장강명의 글은 마치 우리 모두가 그 특권을 누리고 있던 와중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그 보편적 경험을 위협하게 되었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의 가치는 "급여와는 상관없다"(225)고 주장했지만, 운수업 종사자들의 노동에 인공지능이 미칠 해악을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밥벌이"를 잃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밥벌이는 가치 상실과는 다른 층위의 문제다. '가치 상실'이라는 문제에 소설가와 바둑 기사들이 놓이고 '일자리 상실'이라는 문제에 화물차 기사들이 놓인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인간성'을 위협한다는 장강명의 주장이 주로 전자의 사례들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장강명이 암묵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는 어떤 분할선을 보여 주는 것 아닐까? 화물차 기사라는 직업에는 어떤 종류의 '인간성'이 있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일까?
대치동과 목동에서 대입 면접 대비 수업을 했을 때, '돌봄 인공지능'에 관한 제시문을 읽은 적이 있다. 돌봄 대상자와 교감하고 그의 정서적 필요를 충족하는 일을, '더 효율적인 돌봄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인공지능에게 맡기려는 기획 자체가 인간성에 대한 일종의 위협이 된다는 요지였던 글로 기억한다. 나는 대입 준비반 강사의 소임에서 너무 벗어나지 않으려 주의하면서, 제시문의 논지에 어떻게 문제를 제기하며 어떤 방식으로 반대하는 것이 면접관들로 하여금 '더 사고력 높은 학생'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지 신중하게 설명했다. 제시문은 이미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기저귀를 갈아 주는 일은 '로봇도 할 수 있는 일'로, 그 할아버지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반응해 주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로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돌봄노동자들이 더 많은 주의와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주로 전자와 같은 종류의 일이다. 후자의 일로부터 '인간성'을 정의하려 하는 순간, 우리는 전자에 매진한 사람들의 노동 현장 대부분에서 '인간적 의미'를 본의 아니게 제거하게 된다. 이것은 윤리적 태도의 문제뿐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신체적으로 돌보는 작업이 얼마나 정교하고 기술적 노하우가 필요한 일인지를 이해하려는 인식론적 태도의 문제에도 부착되는 것이다.
어떤 인공지능에 대해 '인간성을 해친다'고 말하려면, '당신이 말하는 종류의 인간성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장강명은 인간성에 대한 물음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가기 전에 인간성에 대한 물음에서 그쳤다. 그는 소설가이므로, 나는 그가 더 엄밀한 사회학적 분석 따위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자신의 물음 자체에 쉽사리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까지 유혹할 만한 물음의 틀을 설정하는 데 실패했으며, 인공지능에 대한 문학/예술계의 관점과 담론에 특유의 '인문주의적' 요소가 '내재하는' 듯하다는 편견을 확산하는 데 이 책으로써 공헌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인문주의'는 종종 '멋모르고 착해서'가 아니라 나쁜 효과를 낳아서 나쁘다. 소설가의 창작 과정으로부터 '인간성'을 구명하려는 시도가 화물차 기사나 요양보호사를 '인간성'의 자리에서 슬며시 누락할 때, '인문주의적 인간성'은 '(나머지가 아닌) 어떤 사람들을 위한 인간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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