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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년 전, 토마스 모어가 그려낸 이상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가 상상한 ‘유토피아’는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이상향과 얼마나 닮아 있고, 또 얼마나 다를까요?

소설<유토피아>를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민주주의 국가이면서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많은 분들이 민주주의의 반의어를 사회주의라고 생각하기에, 이 표현이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두 개념은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한 개념입니다. 민주주의는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묻는 정치 체제이고, 사회주의는 '재산과 생산 수단을 어떻게 소유하고 분배하는가'를 다루는 경제 체제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반드시 충돌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는 시민이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공동 소유와 평등한 분배를 추구하는 체제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는 현실에서도 가능할까요?

(중략)

사유 재산이 없고, 모두가 동일한 시간 동안 노동하는 유토피아의 제도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이 있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며 도전하려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혁신 역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해파리들과 토론을 진행하면서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과연 모든 사회에 끊임없는 혁신이 반드시 필요한가?'

오늘날의 기술 발전은 분명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혜택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발전은 이미 안정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더 편리하게 만들 뿐,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우리는 발전의 속도보다, 그 방향과 목적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유토피아』는 전혀 다른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이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더 빠른 발전’이 아니라 ‘안정된 삶의 유지’입니다. 이 체제의 핵심은 발전의 속도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입니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빨리 성장하는 것보다, 모두가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유토피아 인들에겐 더 중요한 과제일 것입니다.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186640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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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고 ‘살면서 한 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할 것들‘ 이라는 주제로 서평을 작성해보았습니다.
그 일부를 소개합니다.

책의 작가는 소크라테스처럼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저는 늘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생각하는 성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니체는 성공한 삶을 자신의 운명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사상 중 하나인 ‘영원회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회귀란 동일한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개념입니다. 모든 기억이 지워진 채,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시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영원회귀 속에서, 이 삶을 기꺼이 긍정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 뇌는 좋은 기억보단 나쁜 기억을 더욱 강하고 오래 저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님들은 '아니요'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니체는 삶을 부정하거나 회피하기보다는, 반복되더라도 좋을 만큼 충만하게 살아가려는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에 후회가 없을 때,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만의 성공의 정의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명예욕이 꽤 강한 사람이기에, 제가 생각하는 성공이란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 이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속담처럼, 죽어서도 이름이 남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경제적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제가 그려온 성공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을 접하고 나니, 제가 그려온 성공이 지나치게 외부의 기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어떤 평가를 받는지에 따라 성공을 가늠해 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 뒤따랐습니다. 니체는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성취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얼마나 긍정할 수 있는지를 성공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성공을 바라보는 기준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순간도 많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삶은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일상 속에서 즐거움을 느꼈고,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뿌듯함도 느껴왔습니다. 만약 지금까지의 삶을 다시 한번 그대로 살아야 한다면, 저는 이 삶을 긍정하며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성공한 삶이란 거창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는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여러분의 성공한 삶은 어떤 모습인가요?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158441395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은이), 김하현 (옮긴이) 지음
어크로스 펴냄

3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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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단순한 불륜이나 관계의 파격성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이 다루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사랑’이라기보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진짜 감정이 삶을 얼마나 복잡하게 만드는가에 가깝습니다.

체호프는 사랑이 삶을 구원하거나 명확한 답을 제시해 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사랑은 인물들에게 불안과 갈등, 죄책감과 자각을 동시에 안겨주죠.

사랑을 알게 되었기에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감정을 온전히 선택할 용기나 방법도 갖추지 못한 상태.
​바로 이 지점에서 삶은 단순해지지 않고 더 복잡해져 갑니다.
두 인물은 사랑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공허했는지를 깨닫지만, 그 깨달음은 곧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 되어버리죠.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147915840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푸른숲주니어 펴냄

4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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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알은 자기 자신을 키워주지만 동시에 가두고 있습니다.
이 알은 곧 사회입니다. 그리고 이 사회는 저희에게 선과 악을 정의해주고 이에 따라 정의된 악을 억압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된 악을 모두 억압하다 보면 새는 절대로 알을 깨고 태어날 수 없습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으로 태어난다는 것, SELF를 찾는 개성화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사회이고 세상인 알을 깨뜨려서 개성화에 성공한 새는 날아오릅니다.
그리고 그 새는 신에게 날아갑니다. 그 신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악마를 숭배하지도 않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그리고 칼 융은 저희가 선과 악을 의심하고 모두 스스로의 모습임을 인정하며 그 속에서 SELF를 찾아가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 SELF는 어쩌면 데미안처럼 악마적인 모습을 이중적으로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모습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알을 깨지 못하는 새에게는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싱클레어의 이름이 쏟아지는 것은 아무래도 수많은 싱클레어의 그림자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데미안은 소설 내에서 초반에만 나오고 나중에는 쭉 나오지 않던 프란츠 크로머를 언급합니다.아무리 SELF를 찾고 스스로의 모습을 구축하더라도 크로머라는, 폭력적인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자취를 감췄더라도 언젠가 싱클레어의 머리속에는 크로머가 등장하겠지요.
그럼에도 싱클레어는, 데미안은 걱정이 없습니다. 데미안이라는 SELF는 언제나 싱클레어 안에 살고 있고 자신 스스로를 찾아낸 새는 언제나 선과 악을 초월하는 아브락사스 앞에서 태어날 것이니까요.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143556678

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민음사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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