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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현대지성 펴냄

읽었어요
마지막 파우스트 박사의 구원은 좀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분명 파우스트는 이미 그동안 악마와 함께 새로운 쾌락들을 찾아나서며 죄를 많이 지었고 (그레첸 역시 그의 죄의 일부일 것입니다) 거기다가 마지막에 그는 메피스토펠레스와의 내기에서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를 외치며 패배하여 내기에 의하면 악마에게 영혼을 뺐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괴테는 기본적으로 중세 이후의 고전으로의 회귀, 고전주의를 굉장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애초에 <파우스트>의 서사만 보더라도 기본적으로 신과 악마의 대립이라는 기독교적 관념으로 시작하지만 중간에 헬레네와 에우포리온, 고전적 신화의 이미지가 함께 섞여 들어오며 중세의 엄격한 종교관에서는 절대 인정받을 수 없는 상상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런 가치관 속에서 괴테는 그동안의 중세적 종교의 구원관, 즉 신을 믿으면 혹은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다라는 가치관을 흔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괴테는 스스로도 꾸준히 연구하고 모든 것을 알려고 했던 만큼 노력하고 발전하는 것을 선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저희가 했던 해석에 큰 오류가 발견되게 됩니다. 저희는 단순히 계속해서 변하고 증발하는 쾌락을 악으로 보는 서사에서 이를 뒤집을 때 변한다는 성질을 뒤집어서 변하지 않고 멈추는 것을 선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악을 통해 선을 추론할 때는 증발한다라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변화는 선하지만 이 변화가 자기 스스로를 위해 증발하는 단순한 쾌락이라면 악하는 것이고 계속해서 남으며 발전을 키워내는 노력이라는 씨앗일 때는 선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떠올리고 나면 파우스트 박사가 죽기 전에, 즉 구원받기 전에 “이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는 데에서 멈추어지는 순간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됩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죽기 전 간척 사업을 하며 자유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땅에서 일하고 사는 미래를 상상합니다. 즉, 그가 멈추고 싶어했던 순간은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정적인 순간이 아닌,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는 그 방향석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파우스트는 단순히 논리적인 과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멈춤을 논해 악마와의 내기에서 패배했지만 그 멈춤은 변화와 발전이었기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파우스트는 죽기 전에 멈춤을 선언하며 악마와의 내기에서 패배합니다. 단순한 멈춤, 즉 노력과 발전의 부재는 괴테의 사상 속에서도 동시에 구원받을 수 없는 현상입니다. (이렇게 괴테의 사상을 알고 나면 메피스토펠레스 역시 두 내기를 모두 이기는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파우스트 박사가 선언한 멈춤은 노력과 발전하는 흐름으로서의 멈춤입니다. 즉 변한다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 것이지요. 이렇게 파우스트는 구원받습니다. 파우스트의 멈춤은 변화의 부정이 아닌 변화를 긍정하는 인식의 완성인 것입니다.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2446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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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왜 가장 따뜻한 순간에도 불안할까.
덧없고, 쉽게 흔들리며, 설명할 수 없이 미묘한 사람 사이의 감정을 담아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서평입니다.

- 결말에 관하여
결국 폴은 또다시 혼자 남겨진다. 이 결말은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왜 시몽처럼 잘해주는 사람을 떠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폴의 선택이 공감되었다. 나에게 헌신하고 잘해주는 사람보다, 함께 있을 때 더 편하면서도 어딘가 불안정한 사람에게 끌리는 마음. 다시 혼자가 될 걸 알면서도 로제에게 향하게 되는 그 감정이 낯설지 않았다. 정말 사랑이란 난해하고 모호한 감정이다. 사랑은 논리로 설명되는 선택이라기보다, 스스로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끌려가는 감정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오히려 폴이 로제를 선택했기 때문에, 이 소설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만약 시몽을 선택했다면 익숙하고 빤한 전개로 흘러가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제를 선택했기에 더 공감이 되고, 그래서 더 오래 남는 작품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 브람스 = 시몽
브람스의 음악에는 애절함과 잔잔한 우울이 스며 있다. 한없이 가라앉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밝음과 생동감이 끼어들며 감정을 흔들어 놓는다. 음악을 듣다 보면 단순한 선율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감정이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지점에서 시몽이 브람스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몽은 폴에게 꾸준히 마음을 표현하며 관계를 이어가려 하지만, 결국 폴의 시선은 로제에게로 기울어진다. 그럼에도 시몽은 완전히 물러서지 못한 채, 희망과 체념 사이를 오간다. 폴이 조금이라도 여지를 보이면 금세 밝아지고, 다시 거리를 두면 깊이 가라앉는다.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268364325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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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외투에서 나왔다" (도스토옙스키)

이 말은 단순히 <외투>가 유명하다는 것이 아니라, 현대 문학이 바라보는 인간자체를 바꾸었다는 의미인것 같습니다. 이전의 문학들은 영웅,귀족 등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였지만 외투에서는 하급 공무원인 평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습니다. ​인간을 '강한 존재'가 아니라 '쉽게 무너지는 존재'로 보여준 작품인거죠. 이 <외투>를 시작으로 그 이후의 러시아문학작품들은 개인의 문제뿐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를 함께 묻기 시작했습니다.

작품 속 러시아 사회는 계급이 매우 뚜렷하게 나뉘어 있고, 그 차이는 겉모습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외투의 재질, 모자의 상태, 신발의 질..이런 것들로 그 사람의 위치가 판단되는 사회인거죠. 그 속에서 아까끼는 외양이나 사치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이죠. 그래서 더 쉽게 무시당하고, 존재 자체가 가볍게 여겨지는 사람이였습니다. 하지만 아까끼가 새 외투를 갖게 되면서 그의 삶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외투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인정받게 해주는 상징이 되는 것이죠. 사람들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고, 아까끼 스스로의 마음가짐 또한 변합니다. 그렇다면 아까끼에게 외투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여기서 외투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자존감이자, 사회 속에서의 자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외투를 잃어버리는 순간은 단순한 도난 사건이 아니라 그를 지탱하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이 ‘죽음’으로 향했다는 점에서, 이 상실이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전문보기 : https://blog.naver.com/jellyfish_club/224256684894

외투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 지음
민음사 펴냄

읽었어요
4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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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가 선정한 올해의 책이면서 호불호가 정말 많이 갈리기도 했던 책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서평입니다. 작가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지 서평을 통해 함께 살펴보시죠!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땐 일종의 추리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명한 괴테 연구가 도이치가 어느 날 홍차 티백에 적힌 출처 불명의 ‘괴테 명언’을 발견하고, 그 문장의 출처를 추적해 나간다는 설정이니까 말이죠. 다만 읽으면 읽을수록 추리라고 할 만한 부분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스토리 자체는 귀족의 일상을 다루는 잔잔한 고전 소설 같은 몽글몽글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다만 저는 이 작품의 주제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언어’입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책의 제목으로 돌아가 봅시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이 문장은 괴테라는 인간이 실제로 모든 말을 입 밖으로 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전에 없었던 새로운 생각을 떠올린다 한들 결국 존재하는 언어 체계 내부에 갇혀 새롭지 않은 언어로 표현이 된다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새로운 생각은 쉬우나, 새로운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소설의 언어관은 괴테의 또다른 저서인 『파우스트』를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파우스트』초반부에서 파우스트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파우스트』 초반부에서 파우스트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구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는 ‘말(Word)’이라는 번역에 머무르지 않고, ‘생각(Thought)’, ‘힘(Power)’을 거쳐 결국 ‘행위(Act)’에 도달합니다. 이 장면은 괴테가 진리를 고정된 문장 안에 가두기보다, 살아 움직이는 힘과 실천 속에서 이해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역시 결국 “말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동시에, 말 이전 혹은 말 너머에 있는 생각과 행위의 차원을 암시하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괴테가 정말 그런 말을 했는가’를 묻는 소설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언어와 생각의 차이, 언어의 한계와 오류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의 제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보려고 합니다.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라기보단, 모든 언어는 이미 말해졌고, 우리는 언제나 그 낡은 말들 속에서만 새로운 생각을 더듬거리며 꺼내 놓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언어가 결코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고찰하는 과정을 담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232000442?referrerCode=1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스즈키 유이 지음
리프 펴냄

읽었어요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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