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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삶은 그렇게 간단리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기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은 행방불명인 내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지적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지적이 지금의 주리처럼 나쁜 결과에 대한 동기로 설명되는 일은 적절히 못한 것이었다
그건 옳지 못한 거야 라는 주리의 관용구. 주리는 바로 그 관용구 밑에 숨어서 더 이상은 세상 속으로 나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나는 이모를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했다 주리 식으로 말한다면 이런 거짓말도 분명 ‘옳지 못한 것’이겠지만 나는 주리가 아니고 안진진이었으므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 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 보다 이랬으면 좋았 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 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 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 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 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어쩌면 나는 이모의 넘쳐나는 낭만에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모부 같은 사람을 비난 하는 것보다는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 재의 한없는 모순·•·•·•.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 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열심히 기계의 글자판을 두들기며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면 손가락이 치고 있는 내용과는 관계없는, 그러나 소설의 뒤나 앞에서 반드시 쓰이거 나 쓰였어야 할 문장들이 저 혼자 뚜벅뚜벅 머릿속을 걸어 다니는 일이 벌 어지곤 한다. 그럴 때, 결단코 그 문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문장은 작가 인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나 말고 누군가가, 오직 소설을 위해 아 껴둔 한 말씀을 섬광처럼 발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므로 메모 노트의 글씨들은 몹시 난삽하다. 놓치기 전에 그 말들을 채집하려면 단정할 수가 없다. 그랬다가 혹시 놓치기라도 하면, 잃어버린 그 말들을 되찾기까지 도저히 일을 계속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찾 다찾다 못해서 그만 울어버린 적도 있었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풍요와 빈곤.
『모순」의 창작노트 곳곳에는 이런 종류의 복합어들이 아주 많이 발견 된다. 흘려 쓴 글씨로 붙박여 있는 그 편린들은 아마도 주제에 관한 내 마 음의 무늬일 터였다.
얼마 전부터 나는 이런 식의 서로 상반되는 단어들의 조합을 보면 그 냥 지나치지 못했다. 하나의 개념어에 필연적으로 잇따르는 반대어, 거기 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곡절을 보편성 으로 풀어 쓰는 직업이 작가 아니겠냐고 홀로 질문을 던지기도 했었다.
『모순」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었다. 그랬으므로 이 소설에 쌍 둥이가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단 한 번뿐인 이 삶, 한 사 람을 놓고 두 개의 상반되는 삶을 추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지만 둘이고, 둘이지만 하나인 인생 궤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란성 쌍생아 보다 더 적합한 장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이 중반에 이르렀을 때,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우리들 모두, 인간이란 이름의 일 란성 쌍생아들이 아니었던가 하는 자각. 생김새와 성격은 다르지만, 한 번 만 뒤집으면, 얼마든지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 수 있는 우리.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 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 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작가로 살아가다 보면 이런 질문은 종종 받게 마련이다. 벌써 이십 년 작가였으므로 나 또한 수도 없이 이런 질문 앞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이 십 년 세월 동안 그 대답도 자주 바뀌었다. 작가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하 기 위해서는 작가인 나는, 살아낸 만큼, 소설을 쓴 만큼 대답할 수밖에 없 어서였다. 작가 자신의 전 생애가 담겨진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 작가란
누구인가.
아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답변이라면, 작가란 주어진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현실을 소설 위에 세우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사람 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서 한 번뿐인 삶을 반성하 고 사색하게 하는 장르가 바로 소설이라고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일 하게 믿어왔다. 남의 소설을 읽을 때나 내 소설을 쓸 때도 나는 이 기본원 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주어진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야기 와 새로운 현실에서 얻은 감동을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바로 작가가 꿈꾸는 세상이다.
그래서 내게 있어 '이야기'와 감동'은 소설 창작의 핵심적인 화두이며 전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작가인 나는 '이야기'와 '감동'이란 주제에 매 달려 사는 사람이다. 작가는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를 함께 성취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데 작가의 고민이 있다.
소설의 제목을 정하면서 많이 망설였다. 『모순」이라는 추상적 개념어 를 가장 구체적인 현실을 다루는 소설의 제목으로 삼기에는 좀 무겁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들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모순투성이였다. 이론상의 진실과 마음속 진실은 언제나 한 방향만을 가 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모순」은 무엇을 따라도 모순의 벽과 맞닥뜨려지 는 인간과 삶에 관한 진술이었다. 세상의 일들이란 모순으로 짜여있으며 그 모순을 이해할 때 조금 더 삶의 본질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 이상 구체성을 띤 제목은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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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매님의 인생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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