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O님의 프로필 이미지

LGO

@gaon__lee0819

+ 팔로우
염소의 맛의 표지 이미지

염소의 맛

바스티앙 비베스 지음
미메시스 펴냄

[독서 후 코멘트]

# 많은 걸 내비치지만, 많은 걸 감추는 수영장
어디서나 있을 법한 수영장 내 여러 인간 군상을 그려낸 작품. 물안경 너머로만 서로를 훔쳐보는, 반쯤 벗은 채로도 철저히 익명인 현대 도시의 축소판인 수영장.

# 여주인공의 물속 몸짓은 무슨 의미였을까
물속에서 여자는 남주인공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책 마지막에도 여자의 동작을 그린 부분을 따로 배정한 거면 분명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쓴 작가가 여자의 말은 자신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평생 비밀로 간직할 것이라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저자가 남긴 한 인터뷰를 통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미국 밴드 케이크(Cake)의 노래 「World of Two」를 부르는 모습이라고 밝힌 바 있다. 「World of Two」는 두 사람이 바깥세상과 분리된 자신들만의 작은 세계를 이룬다는, 쓸쓸함을 자아내는 노래다. 그 노래의 제목이 곧 그녀가 물속에서 건넨 노랫말 없는 몸짓의 방향을 추측해 본다.

[발췌한 책 속 문장]

75p
“간단히 말하면, 호흡, 다리, 팔을 동시에 잘 움직여야 해. 우선 팔부터, 물속에서 중심을 잘 잡은 상태에서 팔꿈치와 어깨를 높이 들어. 그러고선 반대쪽 손을 허벅지까지 쭉 밀어내. 밀어낸 손을 다시 원위치로 가져오는데, 팔꿈치를 높이 들어야 돼. 손이 겨드랑이에 닿을 듯한 느낌으로, 그리고 다리는 계속 물장구 쳐야 돼. 절대로 멈추면 안 돼. 자기 리듬을 찾아야 돼. 두 박자든, 세 박자든, 다섯 박자든 상관없어. 너 다리는 잘하잖아.”
=> 대화가 거의 없는 책에서 가장 긴 대사는 여주인공의 기술 설명이었다.

“마지막으로 호흡인데, 너만의 리듬을 찾아야 돼. 물속에서는 천천히 숨을 내쉬어. 그러지 않으면 금방 진이 빠지거든.”
=> 인생을 산 지 몇십 년 만에 자유형 동작 설명을, 책을 통해 접했다.
0

LGO님의 다른 게시물

LGO님의 프로필 이미지

LGO

@gaon__lee0819

  • LGO님의 레드불 스파 게시물 이미지
  • LGO님의 레드불 스파 게시물 이미지
[독서 후 코멘트]

『레드불 스파』는 대한민국의 급소를 정확히 찌르는 소설이다. 관심으로 연명하는 삶, 재난에도 멈추지 않는 시스템, 좀비와 구별되지 않는 대한민국 국민의 일상을 사우나 속에서 가격한다. 다른 여주인공 쌈루타의 설정이 헐거운 면이 있지만, 세상이 끝나는 밤에도 700그램을 빼야 하는 현지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 이를 금방 잊게 되었다.

[발췌한 책 속 문장]

54p 그러나 하나의 후회는 언제나 극도의 연쇄적 힘을 가지고 있다. 마치 유치원 다니던 시절 만들었던 색종이 사슬처럼, 둥그렇고 쨍한 색의 후회는 또 다른 후회로 계속해 이어진다.

59p 먹고사니즘이란 원체 중요하고, 한국인들은 그 무슨 일이 일어나도 꾸역꾸역 직장으로 향하는 민족으로 또 유명하니까.
=> 악천후 속에서도 학교로 향하고, 직장으로 향하는 한국인들이 찍힌 뉴스 자료 영상들이 떠오른다.

97p 손님에게 먼저 퍼 드려야 하는 동방예의지국의 사람들이 내뱉는 저열한 속내들.
=> 동방 예의의 겉면으로 덮어도 인간의 심리 본질은 쉽사리 바뀔 수 없다.

119p 비열할 정도로 치열하게 사는 사람의 두 콧구멍에선 이산화탄소가 남들보다 두어 배는 풍풍 뿜어져 나오지 않을까. 그럼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전 지구의 안위를 위해서는 훨씬 이롭지 않으려나.
=> 신체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는 같을지라도, 그 인간의 악행으로 배출되는 공해 물질은 일반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수 있다.

137P 언제나 그렇듯 실컷 사고를 친 하이드가 책임도 안 진 채 퇴장하고 나면, 왜소한 지킬이 비척비척 등장해 비로소 자기 인식을 시작하기 마련이었다.

139P 선수의 운동만큼이나 중요한 게 그 윗사람들의 정치였다. 승유는 지현을 이 자리까지 올리기 위해, 그리고 이 시합을 성사시키기 위해 수많은 골프 모임과 식사 자리 및 술자리에 불려 다녔다고 했다.
=> 승유가 지현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 같지만, 승유도 고충이 있었다. 원치 않은 술자리와 회식은 정말로 야만적이다.

149P 매일 죽고 싶다 염불을 외면서도 그 정도의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사람이 흔한가? 전혀.

152P 평소에 느끼는 당혹감과 분노를 쏟아부어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대상이 사람들에겐 필요했다.
=> 돌팔매질은 원시 시절부터 내려온 전통.

162P “이제는 말도 잘하는 좀비들이 천지라고, 하룻밤 만에.”
=> 세계관 속 사회 활동이 가능한 좀비 바이러스는 어떤 연유로 탄생했을까? 그리고 좀비가 나타나도 시합을 강행하는 세계관 속 대한민국의 높으신 분들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172P 그 어떤 판이든, 그 무슨 일이든 그걸 감싸고 있는 외피는 서로 다를지 몰라도 구조는 동일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직감하고 있었다.

197P 덕질이란 티백으로 차를 우려내는 일과 같아서, 몇 번이고 우릴 수 있고 수만 번을 반복해도 미세한 알갱이가 남아 있기 마련이었다.
=> 어떻게든 떨쳐내려 해도 약간의 관심의 재가 남아 있으면, 덕질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다.

202P 어려서부터 새벽마다 맨발의 승려에게 공양하며 불심을 쌓아 왔던 쌈루타는, 어디서든 잘못되거나 가여운 장면을 묵인하는 순간 윤회의 수레바퀴에 쌓일 업보를 걱정하며 살아왔다.
=> 업보론은 수많은 데이터베이스가 있기 때문에 그 힘과 역사를 인정받는다.

레드불 스파

설재인 지음
한끼 펴냄

2주 전
0
LGO님의 프로필 이미지

LGO

@gaon__lee0819

  • LGO님의 5번 레인 게시물 이미지
  • LGO님의 5번 레인 게시물 이미지
[독서 후 코멘트]

# 5번 레인의 의미
수영 결승에서 레인 배정은 예선 기록 순이다. 1위가 물살이 가장 안정된 한가운데 4번 레인을 받고, 2위가 그 옆 5번 레인에 선다. 즉, '5번 레인'은 챔피언의 자리가 아니라 도전자의 자리다. 8년을 수영해 온 에이스 나루가 라이벌 초희에게 자꾸 2등으로 밀리는 자리이기도 하다.

# 주인공 스스로 반성하고 사과하기
소설을 관통하는 중요한 사건은 수영복 절도다. 초희에게 거듭 밀리던 나루는 열등감 속에 초희의 수영복을 훔친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이후 수영복을 돌려준다. 그와 동시에 진심 어린 사과와 편지를 건네며 작품 말미엔 수영 대회 경쟁으로 화해한다. 어린이문학에서 주인공은 대개 '착한 아이'이거나 잘못해도 실수 수준인데, 작품에서 주인공은 명백한 절도를 저지른다. 그리고 그 잘못을 우연한 발각이나 어른의 개입이 아니라, 나루 자신의 직면과 고백과 회복으로 통과한다.

# 도약의 발판, 5번 레인
결국 소설은 나루를 끝내 1등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마지막 대회에서도 나루는 초희에게 밀리지만, 이번에는 그 2위를 떳떳하게 받아들인다. 5번 레인은 무너져 머무르는 자리가 아니라 다시 일어나 나아갈 발판이 되며, 1등의 서사가 넘치는 세상에서 2등의 자리를 성장의 좌표로 새긴 책은 결과 지상주의 사회의 대한민국 어린이들에게 건네는 선물이라는 심사 평을 인용한다.

[발췌한 책 속 문장]

38p 나루도 알고 있다. 수영은 무엇보다 집중력이 중요한 종목이다. 환상의 호흡을 보여 줄 팀원도 없고, 신체 조건을 보완해 줄 현란한 기술도 없다. 믿을 구석이라고는 오로지 나 자신과 물뿐이다. 그뿐인가, 가끔은 물마저도 내 편이 아닌 날도 있다.
=> 수영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대면의 공간이다.

60p 나루는 가끔 시합장이 마법의 공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법사들이 허공에 지팡이를 흔들어 비밀의 포털을 열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커다란 시합장 문을 열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들어와 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 시합장의 문은 세계관이 바뀌는 경계다. 시합장에선 선수들의 일상이 끝나고 승부의 시간이 시작된다.

61p 뻑뻑하게 사람들로 가득 찬 경영 풀과는 달리, 다이빙 풀 쪽의 관중석은 반도 차지 않았다. 나루는 그 온도 차이에 조금 놀랐다. 시합장 안에 나루가 모르는 또 다른 세상이 하나 더 있었다.
=> 어린이의 눈에서 본, 비인기 종목과 인기 종목의 차이. 그러기에 더 가슴이 아파진다.

67p “입수가 기가 막히게 잘되면 딱 이런 느낌이거든. 수백 개의 공기 방울이 얇은 이불처럼 내 몸을 감싸 줘. 오늘 마지막에 딱 그랬어.”
=> 다이빙으로 전향한 나루의 언니, 버들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문장.

87p 대회 시작 전, 태양이는 레인 끝 결승점에 자신이 꼭 열어야 할 문이 있다고 생각했다. 뒤로 몇 개의 문이 더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우승한 그 순간만큼은 첫 번째 문을 통과했다는 기쁨에 가슴이 벅찼다.
=> 생이 다할 때까지 인간은 수많은 결승점을 통과해야 한다. 남은 문의 개수를 모른다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계속 헤엄칠 이유가 된다.

91p 대회에서 본 수영부 아이들은 달랐다. 분명히 그 순간 같은 장소에 함께 있었지만,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었다. 감싸고 있는 공기가 달랐고, 스타트대 위에서의 긴장감이 달랐고, 터치패드를 찍고 나서의 간절함도 달랐다.
=> 태양은 수영부 아이들의 삶과 수영에 대한 마음가짐이 공기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음을 느낀다. 그가 잠시 잃어버린 간절함을 타인들의 공기에서 재발견한다.

97p 마음에 두 가지를 담고 있다고 해서 꼭 하나의 크기가 100중의 50인 것은 아니다.
=> 마음에 둘 다 100을 추구하는 건 불가능이 아니다. 마음은 제로섬으로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112p 하지만 수영은 0.01초의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일이 허다하다. 물 밖의 1초와 물속의 1초는 그 무게가 천지 차이이다.
=> 육상 선수에게도 물 밖의 1초와 물 안의 1초를 다르게 느낄 수 있는 일. 시간의 가치는 의미 부여의 크기에 비례한다.

118p 제대로 된 자세가 몸에 배기 위해서는 수많은 반복이 필요하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도 움직일 수 있어야 시합에 나가도 그대로 할 수 있다.
=> 훈련이 무조건 성공은 보장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저점을 방어할 확률은 성공보단 훨씬 높다.

126p 나루의 핸드폰에 비밀 채팅방 초대 알림이 떴다. 태양이었다. 그 순간, 나루의 마음에 진도 3 정도의 지진이 일었다. 느낄 수 있지만 아직 피해는 없다.
=> 감정을 재난의 언어로 표현하되, 그 재난을 기다려지게 만드는 역설이 공존한다. 마음의 두근거림을 진도로 표현한 귀여운 문장.

164p 소문이란 전자레인지에 들어간 팝콘처럼 조금의 열만 가해져도 기다렸다는 듯이 부풀려지는 법이다.
=> 천리를 가는 발 없는 말과, 열만 가해졌을 뿐인데 부피가 급격히 커지는 팝콘 옥수수.

175p 운동이라는 게 그랬다. 인내는 지긋지긋하게 쓰고 열매는 짜릿하게 달다. 나루는 그 달콤함에 취해서 아무리 쓴 인내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쓰디쓴 인내의 끝에 열매가 없다면? 그래도 운동을 계속해야 할까?
=> 전 세계 엘리트 선수들이 매일 지닌 고민.

190p 다이빙대에 오른 이상, 누군가 밀쳐 떨어지기보다는 스스로 뛰어내려야 한다.
=> 결정에는 자신의 비율이 0%일 수 없다.

209p 다시 부끄럽지 않게 물 앞에 서기 위해서는, 잘못을 바로잡아야 했다.
=> 나루는 떳떳함은 기억을 지워서가 아니라 잘못을 갚아서 회복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211p 어쩌면 친구들은 이해해 줄지 모른다고 기대를 품었지만 역시 아닌 건 아닌 거다.
=> 잘못을 세탁해 주는 관계는 편하지만, 사람을 썩게 한다. 아닌 걸 아니라 해주는 관계는 아프지만 사람을 자라게 한다. 반성할 수 있게 하는 친구가 진퉁.

221p 마음에 돌덩이를 안고 있느니 등에 돌덩이를 업고 뛰는 편이 훨씬 후련했다.
=> 여러 불행한 일에도 인간이 선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의 기반엔, 인간의 양심이 본성이라는 데에 있다.

224p 나루는 이날 초희를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의 경기야말로, 어떻게 졌는지가 중요한 시합이었다. 그런 시합이 있다는 걸 이제는 나루도 알았다.
=> 작가는 마지막까지 나루에게 우승을 주지 않는다. 화해했으니, 성장했으니 1등으로 보상하는 관성적 결말을 거부하며 '어떻게 졌는가'를 최종 시험으로 삼았다.

226p 결과가 좋든 나쁘든, 나루 손으로, 나루의 두 팔과 다리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승리의 기쁨도 패배의 분함도 떳떳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승패를 떳떳하게 받아들이려면 결과가 온전히 내 것이어야 한다.

233p 작가는 아이들이 세계와 싸우며 거대한 모험을 하는 이야기 대신 저마다의 빛과 그림자를 통과하며 자신의 터치패드에 정정당당하게 도달하는 이야기를 선택했다. 이토록 현실적이며 촘촘한 시선이 이 작품을 반짝거리게 한다.
=> 열세 살의 유소년에게는 라이벌에게 지는 것, 잘못을 고백하는 것, 좋아하는 아이에게 답장하는 것도 거대한 모험일 수 있다.

234p 어릴 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한 존재가 어른이 되어서 갑자기 그것과 직면할 힘을 얻게 될 리 없다.
=> 성공한 엘리트 중에서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들여다본 과정을 거친 어른들은 얼마나 있을까? 글을 적는 나도 진정으로 성찰을 한 적이 있을까? 이 책을 통해 어른이라고 동화 읽기를 가려선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어릴 적 건너뛴 성찰을 5번 레인의 보충 수영 훈련으로 학습하려 한다. 늦었을지라도, 늦지 않았다는 최면을 하면서.

5번 레인

은소홀 지음
문학동네 펴냄

2주 전
0
LGO님의 프로필 이미지

LGO

@gaon__lee0819

  • LGO님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게시물 이미지
  • LGO님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게시물 이미지
[독서 후 코멘트]

# 탐미주의자는 도덕을 버리지 않았다.
초판 스캔들 이후 1891년 판에서 저자는 서문에서 "도덕적인 책이나 부도덕한 책은 없다“라고 말하며 예술의 자율성을 선언한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모든 과잉은 벌을 부른다"라는 오래된 도덕을 서사로 증명했다. 쾌락을 좇은 자는 파멸하고, 죄는 초상화에 낱낱이 기록되며, 결말에서 칼은 정확히 죄인의 심장을 찾아간다. 책의 결말은 근래 학계에서 와일드의 예술관과 미학에서 도덕성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다는 견해가 주목받는 이유가 된다,

# 도리언과 헨리의 유지는, 소환사의 협곡에도 이어진다.
한편, 책의 주인공 도리언과 헨리의 주요 가치관을 이루는 탐미주의적 면모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진’이 떠오른다. 진은 살인을 작품으로, 죽음을 미장센으로 대한다. 그의 면모는 헨리가 시빌의 자살을 "이 시대의 위대한 낭만적 비극"으로 감상하고, 나아가 도리언이 살인 후에도 초상화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과 유사하다. 130년 전 와일드가 드러낸 위험한 시선이, 오늘날 게임의 악역들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

[발췌한 책 속 문장]

7P 예술가는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예술은 드러내고 예술가는 감추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7P 비평가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다른 방식으로, 혹은 새로운 논거(論據)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가장 저급한 형식의 비평에서와 같이 비평이 추구하는 최고의 형식 역시 자서전의 양식이 될 수밖에 없다.
=> 와일드는 비평을 창작과 동급의 예술로 인정한다. 전에 읽었던 『부유하는 단어들』의 저자와는 완전히 반대.

7P 도덕적인 책이나 부도덕한 책은 없다. 잘 쓴 책, 혹은 잘 쓰지 못한 책, 이 둘 중 하나다. 그뿐이다.

8P 한 예술 작품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은 그 작품이 새롭고,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살아 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 자기 책을 향한 비난을 살아 있음의 증거로 정의하는 저자의 반격. 그리고 2세기 전 출판될 때부터 거센 논쟁의 폭풍에 있던 이 작품은 현재도 많은 의견 개진에 둘러싸여 있다.

13P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이 세상에 딱 하나 있어. 그게 뭐냐면, 사람들이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는 거야.”

64P 그는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게임의 규칙에 맞추어 그때그때 기회를 보아 공적인 삶에서는 자기 당의 지도자를 따르고, 사적인 삶에서는 최고의 요리사를 찾아 다니며 토리 당원들과 식사를 하고, 자유주의자들과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이었다.
=> 불사조의 칭호가 붙은 모 정치인이 떠오른다. 그 불꽃도 꺼진지 오래지만.

96P 경험이 실제로 증명해 보이는 것은 고작해야 우리의 미래가 과거와 똑같은 것이 되리라는 사실이고, 한때 우리가 저지른 죄를 혐오하면서도 그 죄를 거듭하고, 그것도 기꺼이 반복한다는 사실이다.
=> 근절은 못하더라도 최소한으로 할 수 있도록 반성하고, 역사를 공부해야겠지.

99P 젊은 여자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새장에 갇힌 새가 기쁨에 겨워 신나게 울어 대는 것 같았다.
=> 사랑의 기쁨을 묘사할 때 ‘새장’의 은유가 사용된 것이 그녀의 비극적 결말의 복선.

108P 그러나 그가 우울하고 기분이 언짢은 것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록 그가 경험은 없지만 그래도 시빌에게 찾아올 것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고, 그래도 시빌에게 시련이 찾아올 것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고, 그래서 마음이 더욱 무거웠던 것이다. 누나에게 사랑을 안겨 준 그 멋쟁이라는 젊은 친구가 오히려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가 신사라고 하지만 짐은 바로 그 점 때문에 더욱 그가 싫었다.
=> 시빌 베인의 비극을 암시하는 문장. 상위 계급이 하위 계급에 피해를 줄 거라 직감한 하위계층의 씁쓸함.

108P 어린아이들은 자기 부모를 사랑함으로 삶을 시작한다. 그러다 점점 자라면서는 부모를 판단하게 되고, 때로는 부모를 용서하는 일도 생기게 된다.
=> 부모라 해서 무조건 복종하고 숭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가족 구성원은 서로 상호 존중해야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141P 사람은 자신이 더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내보이는 감정에 대해 늘 우스꽝스럽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에게는 시빌 베인의 행동이 우스울 정도로 신파조로 보였다. 그녀의 눈물과 흐느낌이 오히려 그를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다.
=> 식은 사랑은 이렇게나 잔인하다.

147P 초상화는 이미 변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변할 것이 분명했다.
=> 초상화는 도리안의 내면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그리고 도리언이 더 죄를 저지를 것을 암시하는 문장.

157P “도리언, 이 일로 괜히 신경 쓰지 말게. 나랑 같이 저녁 먹고 오페라나 구경 가자고.”
=> 도리언의 전 연인이 죽었는데도 그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만 내세우는 헨리 경의 면모. 도리언은 헨리를 따라갔고, 한 영혼의 타락은 저녁 오페라에서 시작되었다.

160P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사는 동안 아름다운 예술적 요소를 지닌 비극이 일어나기도 해. 아름다움의 요소가 현실적인 것이라면 그 비극적인 일이 바로 우리에게 극적 효과를 가져다준다고.”
=> 타인의 죽음을 미학의 소재로 삼는 대사. 탐미주의와 순수 악의 결합.

167P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함으로 모든 것을 속죄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끔찍했던 날 밤 극장에서 그녀 때문에 겪은 모든 일을 더는 생각하지 않으리라.
=> 도리언이 완연한 악의 길을 따름을 보여주는 문장.

171P “끔찍한 주제는 우리 서로 거론하지 말기로 해요. 어떤 일에 대해서 누구도 말을 안 하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어요. 해리 말대로, 어떤 일에 대해 사람들이 자꾸 말을 하면 그 일에 현실감이 더해지잖아요. 그래도 한 가지 말씀드리면 그 여자가 무남독녀 외동딸은 아닙니다. 잘생긴 아들이 하나 있어요. 물론 연극배우는 아니고 뱃사람으로 일한다든가, 아무튼 그래요.”

172P “어리석고 천박한 사람들만이 어느 한 감정을 지우는 데 몇 년 세월이 걸린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사람은 쉽게 쾌락을 만들어 내듯 쉽게 슬픔을 끝낼 수가 있지요. 저는 제 감정에 좌우되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그 감정을 이용하고 즐기고 지배하고 싶다고요.”
=> 정작 소설 끝까지 도리언은 이 말과 반대되는 삶을 살았다.

173P “내가 초상화를 그려 줬던 그 도리언 그레이를 원하네.”

173P “무서운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은 이 시대의 위대한 낭만적 비극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어요.”
=> 헨리는 도리언이라는 또 다른 헨리를 낳았다. 하지만 헨리는 말로만 흉측한 탐미주의를 남겼지만. 도리언은 스승의 뜻을 실천했다는 것이 문제.

174P “그리고 덧붙이자면, 바질, 진정으로 저를 위로하고 싶으시다면 지난 일을 잊도록, 아니면 예술 본연의 관점에서 보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닌가요?”
=> 탐미주의를 면죄부로 사용하려는, 괴물 도리언 그레이.

185P 낭만적인 사랑에 의해 채색된 우정에는 뭔가 비극적인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소설 안에서는 바질의 죽음으로, 소설 밖에서는 와일드 자신의 재판으로 실현된다.

219P 더욱이 그가 이런 직물과 자수 작품들에 열중했던 것은 이런 귀중한 보물들이, 그리고 그가 아름다운 그의 집에 수집해 놓은 그 모든 것이 어느 한 시절 그에게는 망각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 도리언은 인간성을 잊기 위해 탐미주의에 빠졌지만, 그의 행위는 망각과 불안이 결합한 인간성의 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가 채우려는 인간성의 구멍은 결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22P 어떻게 보면 엄청난 그의 재산이 그를 버티게 만든 안정적인 요소였는지도 모른다.
=> 도리언의 배경이 없었다면 바로 최우선 용의선상에 있을 것임을 보여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223P 그가 보기엔 인간이란 수많은 삶과 감흥을 지닌 존재고, 그 안에 사상과 정열의 여러 진기한 유산을 담지하고 있고, 그 육신조차도 망자들이 지녔던 기괴한 질병으로 더러워진, 여러 모양의 복잡다단한 존재였다

246P 물이 고인 무덤에서 썩어 가는 시체도 이처럼 무섭고 흉측하지는 않으리라.
=> 도리언의 내면은 시체보다 흉측하게 썩어버렸다. 초상화의 부패는 도리언이 저지른 악행의 누적에서 비롯되었다.

260P 그렇게 시간이 죽어 버리자 무서운 생각들이 경주하듯 재빠르게 전면에 등장하더니 시간의 무덤에서 무시무시한 미래를 끄집어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 도리언은 다가올 발각과 처벌의 상상으로 자신을 고문한다.

265P 벽난로 선반 위에서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시간을 잘게 분해해서 하나하나마저 너무 버거워 견딜 수 없는 고뇌의 원자로 전환시키는 것 같았다.
=> 1초가 1년 같이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문장. 흘러가는 시간도 어떻게든 더 아름답고 공포스럽게 표현하려는 작가의 열의가 섬찟하다.

308P 실제의 삶은 혼돈이지만 상상 속에는 무서우리만큼 논리적인 무엇이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풀어 죄악의 발꿈치를 물어뜯도록 한 것은 상상력이었다. 모든 범죄가 기형의 자식들을 낳도록 만든 것도 상상력이었다.

324P “더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해리! 당신은 모든 것을 비웃고 조롱하다가 나중에는 가장 처참한 비극적인 결말만을 내놓는단 말입니다.”

330P “사람이 인생을 예술적으로 다루다 보면 자기 뇌가 바로 심장이 되는 걸세.”

332P “나이 든 사람의 비극은 그 사람이 나이가 들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여전히 젊다는 데 있네.”
=> 정신이 성장하지 못하면, 나이가 들어도 그 사람의 뒤떨어지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338P 아! 자만과 격정에 휩싸인 그 끔찍했던 순간에 그는 초상화가 세월의 짐을 지고 자신은 영원한 젊음의 순수한 광채를 유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던가! 모든 그의 잘못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는 죄를 지을 때마다 확실하고 신속한 처벌이 뒤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야 했다.
=> 소설 끝까지 도리언은 자신의 책임에서 벗어나려 한다. 도리언의 ‘후회’는 거래의 언어였다.

340P 초상화는 여전히 역겨웠다. 아니, 전보다 더 역겨워 보였다.
=> 진정한 반성이 없으니 역겨운 내면도 당연히 그대로였다. 순진한 시골 처녀를 ‘살린’ 선행은 위선이었기에 흉측함이 추가된 것이다.

342P 초상화가 그에게는 양심과 같은 것이었다. 맞다. 그것이 그의 양심이었다. 그는 그 양심을 파괴할 것이다.
=> 초상화를 파괴함으로써 인간성을 완전히 버리는 도리언. 양심의 살해는 곧 자기 살해였다.

352P 와일드의 『초상』은 간단히 말해서 살아 있는 영혼의 복잡성을 무시한 채, 배제한 채, 이상적인 자아를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극화시킨 작품이다.

355P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이 그토록 되고 싶었던 존재이고, 헨리 워튼 경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고, 바질 홀워드는 실제 자신의 모습이라 말한 바 있다.
=> 소설 속 세 인물은 저자의 내부 인격이었다.

355P 퀸즈베리 후작과의 고소사건에서 와일드는 『초상』이 그의 자전적 작품이 아니냐는 비판에 결코 그렇지 않다고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작품의 주제를 자신의 삶에서 취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 모든 사실을 염두에 두면, 결국 『초상』은 예술과 삶, 그리고 그 길항 관계에서 빚어진 고통의 문제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 지음
열린책들 펴냄

3주 전
0

LGO님의 게시물이 더 궁금하다면?

게시물 더보기
웹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