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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상태: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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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세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열린책들 펴냄

장미의 이름은 겉으로 보면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이다. 1327년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에서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윌리엄과 그의 견습 수도사 아드소가,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수도사들의 의문사를 파헤치는 이야기다. 근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느낀 건, 이게 단순한 추리물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훨씬 크고 무거운 질문을 깔고 있다는 거였다.

사건의 발단은 놀랍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시학 2권, 그러니까 희극과 웃음을 다룬 책 한 권이었다. 수도원의 눈먼 전직 사서 호르헤 수도사는 웃음이라는 걸 신을 향한 경외심을 무너뜨리는 위험한 것으로 여긴다. 신을 섬기는 수도원에는 근엄함과 두려움만 있어야 하는데, 웃음이라는 게 그 권위에 균열을 낸다고 믿는 거다. 그래서 그는 이 책 한 권을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그 책에 접근하려는 수도사들을 하나둘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처음엔 왜 책 한 권 때문에 이렇게까지 사람을 죽이나 싶었는데, 읽다 보니 호르헤한테는 그게 단순한 책이 아니라 자기가 평생 지켜온 세계관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협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결국 마지막에 호르헤는 자기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그 책을 손에 쥔 채로, 서고 전체를 불태우며 스스로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던 건, 그가 태운 게 단지 책 한 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불태운 서고에는 인류가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필사하고 번역하고 지켜온 온갖 지식이 쌓여 있었다. 누군가는 평생을 바쳐 그 책들을 옮겨 적었을 거고, 누군가는 그 지식을 후대에 전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험한 길을 오가며 필사본을 실어 날랐을 것이다. 그 모든 시간과 정성이, 단 한 사람이 웃음이라는 감정 하나를 두려워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어버린다. 나는 이 대목에서 지식이라는 게 얼마나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는 건지, 그리고 그 지식을 지키고 없애는 힘이 결국 한 개인의 편협한 확신에 의해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게 소름 끼치도록 무섭게 다가왔다.

더 무서웠던 건, 호르헤가 그 순간까지도 자기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악마가 되려고 그 불을 지른 게 아니라, 오히려 신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믿는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 그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었던 거다. 자기 확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단 한 번도 열어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살인도, 방화도, 자기 죽음까지도 정당한 대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신념이라는 게 그 자체로는 선악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걸 절감했다. 무엇을 믿느냐보다, 그 믿음 앞에서 스스로를 얼마나 의심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돌이켜보면 나도 살면서 뭔가를 지나치게 확신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맞다고 믿는 순간, 다른 가능성이나 다른 사람의 입장은 잘 들리지 않게 되는 경험. 물론 호르헤처럼 극단적인 결과로 이어진 적은 없지만, 확신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시야가 좁아진다는 걸 느낄 때가 있었다. 어떤 원칙이나 신념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정작 다른 사람의 말을 아예 차단해버리는 순간들. 그럴 때 나도 모르게 조금씩 호르헤처럼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 장면을 읽으면서 스쳐 지나갔다. 결국 이 소설이 말하려던 건, 지식이나 신념 그 자체가 위험한 게 아니라, 그걸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순간, 그러니까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순간이 진짜 위험하다는 거였다. 나는 지금 뭘 그렇게까지 의심 없이 믿고 있는지, 그리고 그 믿음이 다른 목소리를 얼마나 지워버리고 있는지를 이 책을 덮고 나서 곱씹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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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외진 탑의 어두운 벽에 누군가 손으로 새겨놓은 단어가 있었다. 아낭케. 운명을 뜻하는 이 그리스어를 누가, 어떤 마음으로 새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위고는 그 글자에서 <파리의 노트르담>의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소설을 읽는 동안 자꾸 그 익명의 손을 떠올렸다. 단단한 돌에 글자를 새기려면 얼마간의 힘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견디며 그 벽 앞에 서 있었을까. 자기 삶을 짓누르는 힘에 이름을 붙이고 싶었을까, 아니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말을 자신보다 오래 남을 돌에 맡기고 싶었을까.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벽에 남은 단어를 바라보고 있으면 끝내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그 아래 깊이 묻혀 있을 것만 같았다.

성당이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라는 말도 그 손을 생각하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위고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가도 걸음을 멈추고 성당의 벽면과 파리의 지붕들을 오래 묘사한다. 처음에는 그가 다시 인물들의 이야기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차츰 그 돌들에도 사람의 시간이 스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생의 한 시절을 바쳐 기둥을 세웠고, 누군가는 성당이 완성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죽었을 것이다. 서로 얼굴조차 알지 못했을 사람들이 앞선 이의 손길 위에 자기 몫의 시간을 보태며 하나의 건물을 완성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성당을 올려다보는 일은, 이름을 잃은 수많은 생애가 얼마나 높이 쌓여 있는지 헤아려보는 일처럼 느껴졌다.

‘책이 건물을 죽이리라’는 말은 그래서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인류가 믿음과 지식을 건축에 새겨왔다는 위고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성당은 여러 세대가 함께 쓰고 읽은 거대한 책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 책을 읽기 위해 같은 장소에 모여 같은 벽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나 종이에 인쇄된 문장은 먼 곳까지 옮겨져 저마다의 손에 들어간다. 사람은 이제 함께 올려다보던 것을 혼자 내려다보며 읽게 된 셈이다. 나는 그 시선의 변화 속에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의 변화도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각자의 손에 책이 놓이면서 사람들은 물려받은 믿음을 스스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지만, 무엇을 믿으며 살아갈지도 점점 자기 힘으로 결정해야 했을 것이다.

프롤로는 성당과 책 사이에 자기 삶을 세워놓은 사람이었다. 그는 신앙과 학문에 몰두했지만, 에스메랄다를 향한 욕망이 밀려들자 오랫동안 의지해온 것들로도 자신을 지탱하지 못했다. 나는 그가 평생 쌓아온 질서가 무너지는 모습보다, 그 무너짐의 책임을 한 사람에게 떠넘기는 과정이 더 두려웠다. 자신의 내부에서 시작된 균열을 견디지 못한 그는 에스메랄다가 자신을 무너뜨렸다고 여겼고, 이제는 그녀가 자신을 구해야 한다고 믿는 듯했다.

그를 보며 나는 욕망이 어떻게 자신이 갈망하던 존재를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는지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곁에 있기만 하면 충분할 것 같지만, 욕망은 이내 상대의 마음까지 요구하고, 끝내 그 마음이 향할 곳마저 정하려 든다. 프롤로에게도 에스메랄다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살아야 했고, 자신의 갈망에 응답해야 했다. 그에게 그녀의 거절은 채워지지 않은 욕망을 넘어, 자기 존재 전체를 부정당하는 고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절실하다고 해서 그녀에게 그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비극은 그가 자신의 괴로움을 그녀의 죄로 바꾸어놓는 순간 깊어진다. 그렇게 욕망은 자신이 세운 제단 위에서 경배하던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 나는 그 제단이 두려웠다. 누군가를 자기 삶의 전부로 삼겠다는 맹세 속에, 상대의 삶도 온전히 내 것이어야 한다는 요구가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를 향한 그의 갈망이 거세질수록, 그 곁에는 정작 그녀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자리가 남지 않았다.

콰지모도에게 성당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종소리 때문에 청력을 잃었지만, 자신을 세상에서 더 멀어지게 한 그 건물 안에서 살아갈 자리를 얻었다.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물러섰으나, 그는 성당의 계단과 난간과 종루를 제 몸처럼 익숙하게 오갔다. 그가 에스메랄다를 구해 성역을 외치는 장면에서는, 성당이 그의 팔을 빌려 한 사람을 품에 안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나는 돌로 지은 건물이 어떻게 누군가에게 안식처가 되는지 알 것 같았다. 벽과 지붕 아래로 몸을 피한다고 해서 마음까지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 머물러도 된다는 믿음은 자신을 받아들이고 지켜주는 사람에게서 생겨났다. 에스메랄다에게 성당이 안식처가 되었던 것도, 그 안에서 콰지모도가 그녀의 편이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두꺼운 벽도 에스메랄다를 끝까지 지켜주지는 못한다. 이 대목에 이르자 성당을 덧없는 인간의 삶과 대비되는 영원의 상징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려워졌다. 건물은 사람보다 오래 남을 수 있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까지 오래 살게 해주지는 못한다. 성스러운 장소에도 집착과 폭력이 스며들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한 보호의 약속을 스스로 거두어들인다.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구해 성당으로 데려올 수 있었으나,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세상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그가 할 수 있었던 일과 끝내 할 수 없었던 일 사이에서 오래 머물렀다. 한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은 그토록 절실한데, 그 마음으로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은 너무 적었다.

책을 덮으며 실제 노트르담 성당의 첨탑이 불길 속에서 무너지던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는 오래된 건물을 바라보며, 적어도 무엇인가는 우리보다 오래 남으리라는 위안을 얻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고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서 있으리라는 생각만으로,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첨탑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그 믿음도 함께 흔들렸다. 자신보다 오래 견뎌주기를 바라며 인간이 세워놓은 것들 역시 언젠가는 무너질 수 있었다. 그제야 수백 년을 버텨온 건물 뒤로, 그 오랜 세월 동안 건물을 돌보고 고쳐온 사람들의 손이 떠올랐다. 우리가 영원하다고 느끼는 것들조차 누군가가 계속 보살펴왔기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위고의 서문에 따르면 아낭케라는 글자도 결국 벽에서 지워졌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소설의 시작이 다르게 읽혔다. 한 사람이 돌에 맡긴 말을 돌조차 끝까지 간직하지는 못했다. 다만 지워지기 전에 누군가가 그 글자를 읽었고, 그 앞에 멈춰 서서 알 수 없는 생애를 상상했으며, 그 상상을 다시 문장으로 남겼다. 기억은 그렇게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갔다. 우리가 남긴 것은 언젠가 우리의 이름을 잃고, 처음 의도했던 뜻에서도 멀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라진 뒤에도 반드시 나의 모습으로 남아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면, 그 변화를 소멸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벽에 새겨진 한 단어가 소설이 되고, 그 소설이 먼 훗날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듯, 한 생애는 자신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다른 생애에 스며들기도 한다. 나는 이제 그 벽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보다, 그가 남긴 말을 읽고 있는 내가 무엇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는지를 생각한다. 그에게서 건너온 것은 이름도 얼굴도 아닌, 낯선 삶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는 마음이었다.

파리의 노트르담 2

빅토르 위고 지음
민음사 펴냄

44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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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본토의 일부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앞머리에 놓인 존 던의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저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로버트 조던의 마지막까지 읽고 다시 이 문장으로 돌아오니, ‘섬이 아니다’라는 말이 전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섬이 아니라는 것은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그 연결에서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뿐 아니라 그의 상처에도 영향을 받고, 때로는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의 선택이 만들어놓은 세계 안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인 동시에, 서로의 삶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전쟁은 단순히 죽음이 많이 발생하는 공간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던 수많은 관계를 몇 개의 단어로 잘라내는 방식에 가까웠다. 아군과 적군, 승리와 패배, 필요한 희생과 불필요한 희생.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나면 한 사람의 죽음도 작전을 위해 감수해야 할 숫자로 바꾸기 쉬워진다. 그러나 숫자 하나가 지워질 때 실제로 사라지는 것은 숫자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돌아갈 사람, 아직 하지 못한 말, 살아보지 못한 시간이 함께 사라진다. 전쟁이 잔인한 이유는 사람을 죽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 인간에게 세계 전체였던 삶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계산 가능한 손실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서 조던의 확신보다 그의 망설임에 더 마음이 갔다. 그는 자신이 왜 싸우는지 알고 있고, 자신이 맡은 임무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믿는다. 하지만 그 믿음만으로 눈앞의 죽음을 깨끗하게 지워버리지는 못한다. 그에게 적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면서도 여전히 사람이고, 동료의 희생은 작전의 대가이면서도 한 사람의 생이 끝나는 일이다. 나는 그 모순을 끝까지 견디는 태도가 중요하게 느껴졌다. 사람은 흔히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강함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옳음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쉽게 잔인해질 수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서도 그 옳음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바라보는 것. 어쩌면 양심은 어느 한쪽을 완벽하게 선택하는 능력이 아니라, 선택하고 난 뒤에도 버려진 한쪽을 잊지 않는 능력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런 조던이 마리아를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도 그래서 의미심장했다. 마리아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죽음을 어느 정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필요하다면 죽는 것. 그의 삶은 마치 이미 종착지를 알고 달리는 기차처럼 곧게 뻗어 있다. 그런데 마리아가 나타나면서 그 선 위에 갑자기 가지가 뻗기 시작한다. 전쟁이 끝난 뒤 함께 살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 내일도 이 사람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사랑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미래를 보이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에서 사랑이 죽음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은 죽음을 더 무겁게 만든다. 잃을 것이 없을 때 죽음은 자신의 끝으로만 다가오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죽음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까지 함께 빼앗아간다. 함께 걷지 못할 길과 나누지 못할 대화, 존재할 수도 있었던 수많은 날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사랑이 사람을 살고 싶게 만드는 이유와 죽음을 두렵게 만드는 이유는 어쩌면 같은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을 얻는 일인 동시에, 그 사람과 함께할 수 있었던 미래까지 마음속에 만들어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던에게 주어진 사흘은 이상할 만큼 길게 느껴진다. 객관적인 시간으로 보면 사흘은 한 생애에 비하면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시간의 길이와 우리가 실제로 살아내는 시간의 크기는 반드시 같지 않다.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오늘을 내일로 쉽게 넘긴다. 언젠가 다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말과 마음을 미룬다. 반대로 끝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평범했던 것들이 갑자기 또렷해진다. 한 번의 대화가 오래 남고, 손을 잡는 일이 하나의 사건이 된다. 조던의 사흘이 한 생애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안에 많은 사건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더 이상 시간을 당연하게 여기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끝을 의식하는 순간 시간은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진다.

마리아에게도 사랑은 지나간 일을 없애주는 힘이 아니다. 그녀가 겪은 폭력은 조던을 사랑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가 더 진실하게 느껴졌다. 사랑이 과거를 지울 수 있다고 믿는다면, 사랑은 또 하나의 거짓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은 한 사람이 자신의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는 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만으로 설명되는 사람이 아니고, 조던 역시 전쟁이라는 한 가지 역할로만 설명되는 사람이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지워주지 못하지만, 그 상처 바깥에도 아직 살아보고 싶은 자신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한다. 어쩌면 구원이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부분을 다시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에 조던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는 더 이상 동료들과 함께 갈 수 없지만, 자신에게 남은 몇 분을 그들이 달아날 수 있는 시간으로 바꾼다. 나는 이 장면을 단순한 영웅적 희생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희생이라는 말은 때때로 죽음을 너무 빨리 아름답게 만든다. 내가 오래 생각한 것은 오히려 시간의 방향이었다. 조던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지만, 그가 그 자리에 남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시간은 계속 앞으로 간다. 한 사람에게서 멈춘 시간이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장면에서 나는 존 던의 종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종을 치는 순간 소리는 종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한곳에서 시작된 진동은 공기를 타고 퍼져나가고,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에게까지 닿는다. 한 사람의 삶도 어쩌면 비슷한 방식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고 해도, 살아 있는 동안 만들어낸 선택까지 같은 순간에 멈추는 것은 아니다. 어떤 선택은 다른 사람의 기억이 되고, 어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삶을 견디게 하며, 누군가를 위해 내어준 몇 분은 그 사람이 살아갈 몇 년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삶은 한 사람 안에서 시작되지만 반드시 한 사람 안에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라는 질문을 조금 다르게 읽게 됐다. 이 질문의 핵심은 종이 누구의 죽음을 알리느냐에 있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한 사람의 죽음을 과연 어디까지 그 사람만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으니 자신의 삶에도 분명한 경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 가진 생각과 기억, 사랑과 두려움 속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남기고 간 것들이 수없이 섞여 있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섬이라기보다 수많은 흔적이 잠시 한곳에 모여 만들어진 땅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소설을 덮고 나서야 존 던의 첫 문장이 처음보다 조금 더 선명해졌다. 누구도 온전한 섬이 아니라는 것은 서로 사이좋게 살아야 한다는 아름다운 교훈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 인간의 삶을 완전히 그 사람만의 것으로 떼어놓는 일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받아 자신이 되고, 살아가는 동안 다시 자신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남긴다. 조던 역시 죽지만, 그가 마지막에 내어준 시간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시간 속에서 계속된다.

그래서 종은 한 사람의 끝을 알리면서도, 이상하게 그 사람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한 번 울린 종소리가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듯, 한 사람의 삶도 자신이 끝난 자리에서 완전히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죽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삶의 단절보다 오히려 삶의 경계가 얼마나 불분명한가 하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디까지 나이고, 어디부터가 타인일까.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나를 사랑했던 사람, 나 때문에 달라진 사람과 나를 바꾸어놓은 사람들을 모두 걷어낸 뒤에도 과연 지금의 내가 그대로 남아 있을까. 그 질문 앞에서 다시 서문에 놓인 문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애초부터 섬이 아니었고, 어쩌면 한 번도 완전히 혼자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민음사 펴냄

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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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를 여는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처음부터 조금 의심했다. 정말 행복은 서로 닮아 있고 불행만이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오히려 이 문장을 거꾸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 단순해서 비슷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대개 행복 앞에서는 그 내부를 굳이 해부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잘 돌아가는 시계의 톱니를 하나씩 들여다보는 사람은 드물지만, 시계가 멈추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뚜껑을 열고 무엇이 어긋났는지 살핀다. 불행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불행은 삶의 표면에 금을 내고, 그 틈으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욕망과 두려움, 사랑과 권태, 책임과 고독의 결을 드러낸다. 그러니 불행한 가정들이 저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은 불행이라는 것이 특별히 더 복잡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불행 앞에서야 비로소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에서 안나와 레빈의 이야기가 나란히 흐른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안나는 사교계의 한가운데에서 브론스키와의 사랑이라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레빈은 도시에서 멀어진 들판에서 농부들과 낫을 휘두르며 노동과 가족, 신앙 속에서 삶의 의미를 더듬어간다. 한 사람의 삶은 점점 빠르게 타오르다가 소진되고, 다른 사람의 삶은 흙 위에 한 겹씩 천천히 쌓인다. 그러나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면 두 사람은 사실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무엇이 내 삶을 견디게 할 것인가. 안나는 그 대답을 사랑이라는 하나의 강렬한 감정에서 찾았고, 레빈은 노동과 가족과 타인, 그리고 자신보다 오래 존재해온 어떤 질서 속에서 찾으려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차이는 행복과 불행의 차이라기보다 삶의 공백을 채우는 방식의 차이에 가까워 보였다. 안나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는 불꽃을 원했고, 레빈은 어둠 속에서도 오래 꺼지지 않는 작은 등불들을 하나씩 켜나갔다.

안나의 비극이 유독 서늘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브론스키를 사랑할수록 그녀의 세계는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좁아진다. 처음에 사랑은 답답했던 삶의 벽을 무너뜨리고 바깥으로 나아가는 문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문은 오직 브론스키에게로만 이어지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남편과 아들, 사회적 관계와 자신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뒤, 그녀는 점차 사랑 하나에 자기 존재의 거의 모든 무게를 싣는다. 그러자 사랑은 더 이상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감정이 아니라 삶 전체를 지탱해야 하는 기둥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한 사랑이라도 한 인간의 삶 전체를 혼자 떠받칠 수는 없다. 기둥이 하나뿐인 집은 그 기둥에 작은 균열만 생겨도 건물 전체가 흔들린다. 브론스키의 무심한 표정 하나, 늦은 귀가 하나,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작은 의심 하나가 안나에게는 단순한 연인의 갈등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곧 자신의 존재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을 잃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잃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안나의 비극을 사랑을 선택한 사람에게 내려진 벌처럼 읽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비극은 인간이 단 하나의 존재나 감정에게 자기 삶을 증명해달라고 요구할 때 생기는 위험에 가까워 보였다. 사랑은 한 사람의 삶을 밝혀줄 수는 있어도 그 사람 대신 삶 전체가 되어줄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이 너무 강렬할 때 자꾸만 그것을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착각한다. 마치 태양이 너무 밝아서 그 빛 아래 다른 별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감정이 지나치게 커지면 그 밖에 자신을 붙들고 있던 것들이 모두 사라진 듯 느껴진다. 그러나 별들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된 것뿐이다. 안나는 결국 사랑 이외의 빛을 거의 볼 수 없는 곳까지 걸어갔고, 그 하나의 빛마저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자신에게 남은 세계 전체가 어두워졌다고 믿게 된다.

반대로 레빈이 삶의 의미에 가까워지는 순간들은 이상하리만큼 소박하다. 나는 그가 농부들과 함께 밭에서 낫을 휘두르는 장면을 읽으며, 톨스토이가 왜 하필 사유가 아니라 노동 속에서 그에게 잠깐의 평화를 허락했는지를 생각했다. 레빈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만, 죽음을 앞둔 형의 몸 앞에서는 그 모든 질문과 논리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죽음은 사유로 풀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설명이 끝나는 자리처럼 그 앞에 놓인다. 그런데 들판에서 몸을 움직일 때, 땀이 흐르고 낫이 일정한 간격으로 풀을 베어낼 때, 그는 잠시 질문하는 자신을 잊는다. 그 순간 삶은 설명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살아지고 있는 하나의 리듬이 된다. 나는 여기서 의미라는 것이 우리가 끝끝내 발견해야 할 문장이라기보다, 때로는 질문을 잊을 만큼 무언가에 온전히 몸을 맡기는 순간에 잠깐 나타나는 감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어느 순간 의미가 뒤늦게 우리를 따라잡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나가 마지막으로 기차역을 향해 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 거리의 풍경을 하나같이 추하고 악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장면도 오래 남았다. 그 순간 그녀에게 세상은 갑자기 견딜 수 없이 천박하고 비열한 장소가 된다. 그러나 변한 것이 정말 세상이었을까.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며 절망이라는 감정에는 자기 자신을 세계 전체로 확대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슬픈 사람에게 세상은 슬퍼 보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모든 우연은 위협의 징조로 읽힌다. 마음은 투명한 유리창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색으로 바깥을 물들이는 스테인드글라스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안나의 마지막 세계가 그토록 어두웠던 것은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녀 안에서 이미 너무 많은 빛이 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불행과 세계의 본질을 더 이상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느새 세상에는 절망밖에 없다는 명제로 바뀌는 순간 말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소설의 첫 문장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행복한 가정이 모두 비슷해 보이는 까닭은 어쩌면 행복이 어떤 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것들이 서로의 무게를 조금씩 나누어 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족과 일, 사랑과 우정, 습관과 책임, 신념과 사소한 기쁨들이 서로 기대어 있기 때문에 하나가 흔들려도 삶 전체가 곧바로 쓰러지지 않는 것이다. 행복은 하나의 거대한 기둥 위에 세워진 궁전이 아니라, 얼핏 보기에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수많은 들보와 못이 서로의 무게를 조금씩 나눠 가진 집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안나 카레니나>를 덮고 나서 나는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보다 무엇들이 나를 붙들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됐다. 나는 지금 내 삶의 무게를 어디에 싣고 있는지, 혹시 하나의 사랑이나 하나의 성공, 한 사람의 인정 같은 것에 너무 많은 무게를 몰아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됐다. 안나와 레빈의 삶은 결국 나에게 서로 다른 대답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경고처럼 남았다. 하나는 삶 전체를 단 하나의 불꽃에 맡겼을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그 불길 속에서 자기 모습을 잃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삶이란 거대한 의미 하나를 찾아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작고 평범한 것들에게 조금씩 자신의 무게를 나눠주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삶은 어쩌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견딜 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무너질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유를 만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흔들릴 때는 일이, 일이 무너질 때는 사람이, 믿음이 희미해질 때는 아주 사소한 하루의 습관이 우리를 붙잡아주는 것. 그렇게 서로 다른 작은 기둥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서로의 균열을 대신 견디고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의 상실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어쩌면 톨스토이가 그토록 많은 인물과 관계와 일상을 이 거대한 소설 안에 밀어 넣은 이유도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한 인간의 삶은 결코 하나의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수많은 불완전한 의미들 사이에 조금씩 자신의 무게를 나누어 싣는 일이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민음사 펴냄

19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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