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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세트 - 전4권 (양장)의 표지 이미지

눈물을 마시는 새 세트

이영도 지음
황금가지 펴냄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군.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살지. 누구도 내놓고 싶지 않은 귀중한 것을 마시니.

이 두 문장은 소설 전체를 열고 닫는 열쇠처럼 느껴졌다. 처음 이 대구를 읽었을 때는 그저 대칭적인 아름다움 정도로 받아들였는데, 다 읽고 나니 이게 이 소설이 세워놓은 가장 근본적인 저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과 생존. 이 둘은 결코 같은 것을 마시고 사는 새가 될 수 없었다.

피는 누구도 자기 몸 밖으로 내놓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다. 반대로 눈물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몸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그래서 눈물을 마시는 새는 단순히 스스로 많이 슬퍼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가 견디지 못해 흘려보낸 슬픔까지 받아 마시는 존재에 가까웠다. 한쪽은 남들이 버리고 싶은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한쪽은 남들이 끝까지 지키고 싶은 것을 취한다.

나는 이 대비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어쩌면 자신을 지키는 일과는 반대 방향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눈물을 받아 마신다는 건 다른 존재의 고통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하는 일이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보다 더 쉽게 흔들리고 더 많이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아름다움과 생존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라는 두 개의 뿌리처럼 보였다.

나는 여기서 나가의 심장 적출식을 다시 떠올렸다. 나가는 심장을 몸 밖으로 꺼내 심장탑에 맡김으로써 불사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물론 심장을 적출한다고 해서 모든 감정을 잃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심장이 이 세계에서 감정과 깊이 연결된 기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나는 그 의식을 단순히 죽음을 피하는 기술이라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자기 안의 뜨거운 무엇과 거리를 두는 선택처럼 읽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나가는 피를 마시는 새의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간 종족이었다. 영원에 가까운 삶을 얻는 대신 자기 존재의 한복판에 있어야 할 것을 바깥에 맡겨버린다. 나는 그 장면이 마치 자기 눈물의 근원까지 몸 밖으로 꺼내 봉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륜이 그 적출식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그래서 오래 남았다. 그의 공포에는 어린 시절 목격한 죽음과, 심장을 적출한 뒤 지금의 관계와 삶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함께 얽혀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너머에서 또 다른 것을 읽었다. 어쩌면 륜은 아프더라도 자기 안의 가장 뜨거운 것을 몸에 지닌 채 살아가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나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흔히 자기 보호라고 부르는 것들이 실은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는지 다시 생각했다. 우리도 살면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감정의 심장을 조금씩 탑 속에 넣어두는 선택을 한다. 더 무뎌지고, 덜 기대하고, 덜 아파하고, 대신 더 안전해지는 쪽으로.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마음의 절반을 빼놓거나, 기대를 낮춰 실망할 여지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도 어쩌면 같은 종류의 적출인지 모른다.

그런 선택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매번 모든 것을 걸고 살 수는 없으니까. 다만 그렇게 안전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오래 버티는 대신 점점 더 낮은 목소리로만 노래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심장탑에 넣어둔 게 슬픔뿐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사실 그 안에는 우리가 무언가를 온전히 사랑하고 누군가의 슬픔에 반응할 수 있었던 능력까지 함께 들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는 존재는 결국 아무것도 절실하게 붙잡지 못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었다.

케이건 드라카가 후반부에 자신이 살아 있는 이상 어떤 나가도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옛날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외치는 장면도 이 두 새의 비유와 이어져 보였다. 세상이 언젠가 그의 상실을 과거라고 부르게 될 때, 그는 자기 존재 자체를 그 과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로 남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기억의 그릇으로 내어놓은 사람이었다. 그가 살아 있는 한 나가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완전히 지운 채 살아갈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케이건은 세상의 망각 속도를 홀로 붙잡아 늦추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 소설은 기억하는 일을 아름다운 것으로만 남겨두지도 않았다. 케이건의 기억은 그를 증인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복수에 붙잡힌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잃은 것을 기억한 끝에 한 종족 전체의 절멸을 원하게 된다. 기억은 죽은 사람을 대신해 과거를 증언하게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을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기억한다는 행위가 때로는 사랑보다 더 무거운 책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은 이미 사라져 더 이상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존재들을 향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뿐 아니라, 그 기억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일 것이다. 케이건은 망각에 저항했지만, 동시에 그 기억 때문에 자신이 증오하는 것과 닮아갈 위험 앞에도 서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눈물을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아픔을 오래 품고 있는 일과는 다른지도 모른다. 슬픔을 지운 채 살아가는 것도 답이 아니지만, 슬픔 안에 영원히 머무는 것 역시 삶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프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만으로 자기 자신을 완성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덮으면서 나는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어느 쪽 새에 더 가까운지 생각해보게 됐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더 안전하고 오래가는 쪽으로 조금씩 나를 옮겨왔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런 선택들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을 위해 목소리를 아껴두는 것도 분명 하나의 생존법이니까. 다만 그럴 때마다 나는 아프게 느낄 수 있는 능력과 다른 사람의 아픔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함께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던 것 같다.

눈물을 마시는 새가 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 새는 고통이 아름다워서 노래하는 게 아니다. 누구나 자기 밖으로 흘려보내고 싶어 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래 사는 것과 아름답게 사는 것 중 하나만 고를 수 있다면, 나는 이 소설을 덮고 나서도 여전히 답을 쉽게 내리지 못하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어느 쪽을 택하든 그 선택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것. 아무것도 잃지 않은 채 오래 살면서 동시에 가장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는 존재는, 적어도 이 세계에는 없었다.

그러니 나는 오래 살아남기 위해 모든 눈물을 피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가끔은 누군가가 흘려버린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 때문에 조금 더 아프고 조금 덜 안전해지더라도, 적어도 내가 부를 수 있었던 노래까지 심장탑에 넣어두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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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를 여는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처음부터 조금 의심했다. 정말 행복은 서로 닮아 있고 불행만이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오히려 이 문장을 거꾸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 단순해서 비슷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대개 행복 앞에서는 그 내부를 굳이 해부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잘 돌아가는 시계의 톱니를 하나씩 들여다보는 사람은 드물지만, 시계가 멈추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뚜껑을 열고 무엇이 어긋났는지 살핀다. 불행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불행은 삶의 표면에 금을 내고, 그 틈으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욕망과 두려움, 사랑과 권태, 책임과 고독의 결을 드러낸다. 그러니 불행한 가정들이 저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은 불행이라는 것이 특별히 더 복잡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불행 앞에서야 비로소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에서 안나와 레빈의 이야기가 나란히 흐른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안나는 사교계의 한가운데에서 브론스키와의 사랑이라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레빈은 도시에서 멀어진 들판에서 농부들과 낫을 휘두르며 노동과 가족, 신앙 속에서 삶의 의미를 더듬어간다. 한 사람의 삶은 점점 빠르게 타오르다가 소진되고, 다른 사람의 삶은 흙 위에 한 겹씩 천천히 쌓인다. 그러나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면 두 사람은 사실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무엇이 내 삶을 견디게 할 것인가. 안나는 그 대답을 사랑이라는 하나의 강렬한 감정에서 찾았고, 레빈은 노동과 가족과 타인, 그리고 자신보다 오래 존재해온 어떤 질서 속에서 찾으려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차이는 행복과 불행의 차이라기보다 삶의 공백을 채우는 방식의 차이에 가까워 보였다. 안나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는 불꽃을 원했고, 레빈은 어둠 속에서도 오래 꺼지지 않는 작은 등불들을 하나씩 켜나갔다.

안나의 비극이 유독 서늘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브론스키를 사랑할수록 그녀의 세계는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좁아진다. 처음에 사랑은 답답했던 삶의 벽을 무너뜨리고 바깥으로 나아가는 문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문은 오직 브론스키에게로만 이어지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남편과 아들, 사회적 관계와 자신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뒤, 그녀는 점차 사랑 하나에 자기 존재의 거의 모든 무게를 싣는다. 그러자 사랑은 더 이상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감정이 아니라 삶 전체를 지탱해야 하는 기둥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한 사랑이라도 한 인간의 삶 전체를 혼자 떠받칠 수는 없다. 기둥이 하나뿐인 집은 그 기둥에 작은 균열만 생겨도 건물 전체가 흔들린다. 브론스키의 무심한 표정 하나, 늦은 귀가 하나,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작은 의심 하나가 안나에게는 단순한 연인의 갈등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곧 자신의 존재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을 잃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잃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안나의 비극을 사랑을 선택한 사람에게 내려진 벌처럼 읽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비극은 인간이 단 하나의 존재나 감정에게 자기 삶을 증명해달라고 요구할 때 생기는 위험에 가까워 보였다. 사랑은 한 사람의 삶을 밝혀줄 수는 있어도 그 사람 대신 삶 전체가 되어줄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이 너무 강렬할 때 자꾸만 그것을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착각한다. 마치 태양이 너무 밝아서 그 빛 아래 다른 별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감정이 지나치게 커지면 그 밖에 자신을 붙들고 있던 것들이 모두 사라진 듯 느껴진다. 그러나 별들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된 것뿐이다. 안나는 결국 사랑 이외의 빛을 거의 볼 수 없는 곳까지 걸어갔고, 그 하나의 빛마저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자신에게 남은 세계 전체가 어두워졌다고 믿게 된다.

반대로 레빈이 삶의 의미에 가까워지는 순간들은 이상하리만큼 소박하다. 나는 그가 농부들과 함께 밭에서 낫을 휘두르는 장면을 읽으며, 톨스토이가 왜 하필 사유가 아니라 노동 속에서 그에게 잠깐의 평화를 허락했는지를 생각했다. 레빈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만, 죽음을 앞둔 형의 몸 앞에서는 그 모든 질문과 논리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죽음은 사유로 풀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설명이 끝나는 자리처럼 그 앞에 놓인다. 그런데 들판에서 몸을 움직일 때, 땀이 흐르고 낫이 일정한 간격으로 풀을 베어낼 때, 그는 잠시 질문하는 자신을 잊는다. 그 순간 삶은 설명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살아지고 있는 하나의 리듬이 된다. 나는 여기서 의미라는 것이 우리가 끝끝내 발견해야 할 문장이라기보다, 때로는 질문을 잊을 만큼 무언가에 온전히 몸을 맡기는 순간에 잠깐 나타나는 감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어느 순간 의미가 뒤늦게 우리를 따라잡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나가 마지막으로 기차역을 향해 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 거리의 풍경을 하나같이 추하고 악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장면도 오래 남았다. 그 순간 그녀에게 세상은 갑자기 견딜 수 없이 천박하고 비열한 장소가 된다. 그러나 변한 것이 정말 세상이었을까.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며 절망이라는 감정에는 자기 자신을 세계 전체로 확대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슬픈 사람에게 세상은 슬퍼 보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모든 우연은 위협의 징조로 읽힌다. 마음은 투명한 유리창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색으로 바깥을 물들이는 스테인드글라스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안나의 마지막 세계가 그토록 어두웠던 것은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녀 안에서 이미 너무 많은 빛이 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불행과 세계의 본질을 더 이상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느새 세상에는 절망밖에 없다는 명제로 바뀌는 순간 말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소설의 첫 문장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행복한 가정이 모두 비슷해 보이는 까닭은 어쩌면 행복이 어떤 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것들이 서로의 무게를 조금씩 나누어 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족과 일, 사랑과 우정, 습관과 책임, 신념과 사소한 기쁨들이 서로 기대어 있기 때문에 하나가 흔들려도 삶 전체가 곧바로 쓰러지지 않는 것이다. 행복은 하나의 거대한 기둥 위에 세워진 궁전이 아니라, 얼핏 보기에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수많은 들보와 못이 서로의 무게를 조금씩 나눠 가진 집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안나 카레니나>를 덮고 나서 나는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보다 무엇들이 나를 붙들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됐다. 나는 지금 내 삶의 무게를 어디에 싣고 있는지, 혹시 하나의 사랑이나 하나의 성공, 한 사람의 인정 같은 것에 너무 많은 무게를 몰아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됐다. 안나와 레빈의 삶은 결국 나에게 서로 다른 대답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경고처럼 남았다. 하나는 삶 전체를 단 하나의 불꽃에 맡겼을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그 불길 속에서 자기 모습을 잃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삶이란 거대한 의미 하나를 찾아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작고 평범한 것들에게 조금씩 자신의 무게를 나눠주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삶은 어쩌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견딜 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무너질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유를 만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흔들릴 때는 일이, 일이 무너질 때는 사람이, 믿음이 희미해질 때는 아주 사소한 하루의 습관이 우리를 붙잡아주는 것. 그렇게 서로 다른 작은 기둥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서로의 균열을 대신 견디고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의 상실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어쩌면 톨스토이가 그토록 많은 인물과 관계와 일상을 이 거대한 소설 안에 밀어 넣은 이유도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한 인간의 삶은 결코 하나의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수많은 불완전한 의미들 사이에 조금씩 자신의 무게를 나누어 싣는 일이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민음사 펴냄

3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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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마귀들에게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시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그 돼지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악령>의 문 앞에 놓인 이 누가복음의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을 무신론적 혁명사상을 악령에 빗댄 비교적 분명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은 뒤 다시 이 구절로 돌아오자 이상하게도 ‘귀신’보다 ‘돼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악령은 혼자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것은 반드시 누군가의 몸 안으로 들어가야 했고, 자신을 대신해 달리고 추락하고 죽어줄 육체가 필요했다. 악령에게는 언제나 숙주가 필요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스타브로긴이라는 인물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처음의 스타브로긴은 이상할 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붙잡는 외모와 거의 폭력적일 정도의 매력을 지녔지만, 정작 그의 내부에는 무엇 하나 확실하게 붙들린 것이 없다. 사랑도 신념도 죄책감도 혁명도 그를 끝까지 점유하지 못한다. 그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채 모든 것의 한가운데 서 있지만, 어느 것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그런데 <악령>에서 가장 많은 것을 움직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다.

샤토프는 한때 그에게서 민족과 신앙의 진리를 보았고, 키릴로프는 그와 나눈 사유를 자기 존재의 끝까지 밀어붙인다.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는 아예 스타브로긴을 자신이 만들 혁명의 얼굴로 세우려 한다. 모두가 같은 사람을 바라보지만, 각자가 보는 스타브로긴은 서로 다르다. 누군가는 그에게서 신을 보고, 누군가는 혁명을 보고, 누군가는 구원을 보고, 누군가는 자기 파멸을 정당화할 논리를 본다.

그래서 나는 스타브로긴이 악령을 퍼뜨리는 사람이라기보다, 악령들이 번갈아 깃들 수 있는 텅 빈 성소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중심을 어떤 믿음으로도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안에서 스타브로긴 자신을 본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결핍을 보았다. 그리고 그 결핍에 그의 얼굴을 붙여 신념이라 부르고, 사랑이라 부르고, 혁명이라 부르며 매달렸다.

그런 의미에서 스타브로긴의 카리스마는 빛이라기보다 거울에 가깝다.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의 욕망을 되비춘다. 그러나 거울은 그 어떤 상도 책임지지 않는다.

표트르 베르호벤스키가 스타브로긴에게 자신들의 ‘신’이 되어달라고 매달리는 장면은 이 기묘한 구조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표트르에게 필요한 것은 진짜 신념을 가진 지도자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기에 무엇으로든 꾸밀 수 있는 얼굴이다. 그는 스타브로긴의 공허를 자신의 야심으로 채운 뒤, 그 공허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려 한다.

그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악령>이 사상의 위험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은 언제나 지나치게 강한 신념만은 아니다. 때로는 신념이 사라진 자리가 더 위험하다. 확고한 사상은 적어도 무엇을 믿는지 말할 수 있고, 그렇기에 논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중심에는 반박할 문장조차 없다. 사람들은 그 빈자리에 저마다 원하는 것을 집어넣고, 자신이 집어넣은 것을 진실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렇게 보면 <악령>속 혁명은 하나의 사상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염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중심을 잃은 사람들이 서로의 공허 속으로 자기 결핍을 던지는 과정에 가깝다. 한 사람의 허무는 다른 사람의 야심을 깨우고, 누군가의 상처는 타인의 이론을 만나며, 이론은 다시 폭력의 명분이 된다. 악령은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사람마다 다른 얼굴을 쓰면서도, 빈 곳을 찾아 이동한다는 점에서만 서로 닮아 있다.

키릴로프의 사유도 그 연장선에서 보였다.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신성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를 자살에서 찾는다. 죽음마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인간은 더 이상 어떤 초월적 존재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섬뜩했던 것은 키릴로프의 이론 자체보다 그 이론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절대적인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 죽으려 했지만, 정작 그의 죽음은 표트르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 자기 의지의 절대성을 증명하려던 죽음이 타인의 계획 속 한 조각으로 편입되는 순간, 그의 자유는 처참한 역설이 된다.

나는 여기서 인간이 신의 자리를 비워둔 채 견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했다. 신을 밀어낸다고 해서 그 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어 있는 왕좌는 오히려 끊임없이 새로운 주인을 요구한다. 키릴로프는 그 자리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앉혔고, 표트르는 혁명을 앉혔으며, 샤토프는 민족과 신앙을 되돌려 놓으려 했다. 그리고 스타브로긴은 끝내 아무것도 그 자리에 앉히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잘못된 신을 믿는 일이 아니라, 아무것도 믿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비워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비어 있는 신전에는 언젠가 누군가가 들어온다.

그런 점에서 스테판 트로피모비치가 “아름다움 없이는 인류가 단 1분도 살아갈 수 없다”고 외치는 장면은 이상하리만큼 오래 남았다. 처음에는 시대에 뒤처진 지식인의 낭만적인 탄식처럼 보였지만, 소설의 끝에 가까워질수록 그 말이 오히려 <악령> 전체에 대한 반론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을 효용과 이념, 목적과 수단으로만 나누려는 세계에서 그는 끝내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아름다움을 붙잡는다.

왜 하필 아름다움이어야 했을까.

아마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몇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과 연민과 아름다움은 혁명처럼 역사를 바꾸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세계를 구원할 계획도 내놓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쓸모없는 것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의외로 자유가 아니라 계산이고, 계산이 끝난 자리에는 가장 쉽게 폭력이 들어선다.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살인은 어느새 논리의 결론이 된다.

그래서 <악령>의 수많은 죽음은 단순히 과격한 정치사상이 불러온 비극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 안에서 사랑과 아름다움, 책임과 신앙이 조금씩 빠져나간 뒤 남은 빈 공간이 무엇으로 채워지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공허는 오래 비어 있지 않는다. 우리가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 결정하지 않으면, 언젠가 다른 무언가가 들어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우리가 흔히 ‘카리스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오래 생각했다. 우리는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더 위험한 매혹은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생길지도 모른다.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기 모습을 보여주지만, 공허한 사람은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을 돌려준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스타브로긴이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는 태양이 아니라 검은 구멍에 가까웠다. 스스로 빛을 내지 않으면서도 주변의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휘게 만드는 존재. 사람들은 그에게서 무언가를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자기 안에 있던 것을 그에게 던지고 있었고, 마침내 자신이 던진 것에 이끌려 그의 주위를 돌다가 하나씩 추락했다.

그러고 나니 소설 첫머리의 돼지 떼가 다시 떠올랐다.

악령이 돼지들을 호수로 몰아넣었다는 사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악령이 들어갈 몸을 끝내 찾아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은 자기 안을 완전히 비워둔 채 살아갈 수 없다. 무엇도 믿지 않겠다는 결심조차 결국 하나의 믿음이 되고, 신을 몰아낸 자리에는 자유든 혁명이든 자아든 또 다른 절대자가 들어선다.

그래서 <악령>을 읽고 내가 두려워하게 된 것은 광신 그 자체보다 공허였다. 뜨겁게 무언가를 믿는 사람보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채 모든 것을 비추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매혹적인 빈자리. 악령은 어쩌면 우리를 설득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비워둔 자리를 발견하고, 그곳을 자기 자리로 삼는 것인지도 모른다.

악령 3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은이), 김연경 (옮긴이) 지음
민음사 펴냄

13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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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상태:카뮈)

@smlee682

험버트 험버트가 소설의 첫 페이지부터 ‘롤리타’라는 이름을 혀끝에서 굴리듯 부르는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이상할 만큼 오래 불편했다. 그 불편함은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든 것은, 그토록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문장이 지나치게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문장은 매끄럽고 재치 있으며 때로는 황홀할 만큼 정교하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자꾸만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지 감각 사이에 놓였다. 문장에는 감탄하면서도, 그 문장이 가리고 있는 현실에서는 눈을 돌리지 않아야 했다.

나는 여기서 아름다움과 진실이 반드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선한 것과 쉽게 연결하고, 세련된 언어를 지적인 것과, 지적인 것을 다시 진실한 것과 이어 붙이곤 한다. 그런데 <롤리타>는 그 익숙한 연결을 잔인할 정도로 끊어놓는다. 험버트의 언어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이 가리키는 곳에는 진실이 아니라 은폐가 있다. 그의 문장은 현실을 비추는 창이 아니라 현실 위에 드리운 얇고 화려한 커튼에 가깝다.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우리는 잠시 커튼의 무늬를 바라보다가, 그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잊을 뻔한다.

험버트는 자기 자신을 시인이자 예술가로 만들고, 자신의 욕망 역시 미학의 언어 안에 집어넣는다. 그는 폭력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한 어린아이를 자신의 환상 속에서 ‘님펫’이라는 신비로운 존재로 다시 만들어낸다. 나는 이 대목에서 언어가 단순히 현실을 설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지우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행위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행위의 윤곽도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지배를 사랑이라고 부르고, 착취를 운명이라고 부르고, 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아름다운 비극이라고 부르는 순간, 말은 현실을 가리키는 표지가 아니라 현실을 가리는 가면이 된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롤리타’가 아니라 오히려 ‘돌로레스’인지도 모른다. 롤리타는 험버트가 만들어낸 이름이다. 그가 욕망할 수 있도록 가공한 한 이미지의 이름이고, 실제 소녀의 삶 위에 덧씌운 허구의 이름이다. 반면 돌로레스는 그 환상 아래에 묻혀 있는 한 인간의 이름이다. 나는 험버트가 그녀를 계속 롤리타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이름을 빼앗는 것이 한 사람의 현실을 빼앗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돌로레스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자기 욕망에 맞는 형상을 하나 만들어 그 위에 ‘롤리타’라는 이름을 붙인 뒤, 그 형상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이 소설의 일인칭 서술 자체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험버트는 돌로레스의 삶을 지배했을 뿐 아니라, 그녀를 기억하는 방식까지 지배한다. 독자가 사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창문은 험버트의 목소리이고, 그 창문의 유리에는 이미 그의 욕망과 자기연민과 미학이 짙게 칠해져 있다. 돌로레스의 목소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갇혀 있다. 그녀가 울고,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평범한 또래의 삶을 갈망했던 순간들은 험버트의 화려한 문장 사이에서 잠깐씩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그의 서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을수록 험버트가 하는 말을 읽기보다, 그가 말하지 않는 것을 읽게 됐다.

어쩌면 나보코프가 험버트에게 이토록 매혹적인 언어를 쥐여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만약 험버트가 처음부터 조악하고 혐오스러운 언어만을 사용하는 인물이었다면, 우리는 너무 쉽게 그를 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사람은 나와 전혀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안전한 거리에서 그를 비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롤리타>는 그런 안전한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험버트는 지적이고 재치 있으며, 자신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아름답게 설명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독자는 그의 논리가 아니라 그의 문장에 마음을 내어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바로 그 순간 이 소설의 함정이 닫힌다. 험버트에게 설득당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의 행동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때로 설득은 훨씬 조용하게 일어난다. 한 인간의 고통보다 그것을 묘사한 아름다운 문장을 먼저 바라보게 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시선의 방향을 빼앗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롤리타>가 욕망에 관한 소설인 동시에 독서에 관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을 때 언제나 말하는 사람의 눈을 빌린다. 그러나 누군가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보지 않기로 한 것까지 함께 보지 못하게 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하다. 험버트의 시선만 따라가면 돌로레스는 영원히 롤리타로 남는다. 그 시선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그 이름 뒤에 한때 살아 있었던 아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책을 덮고 나서도 나는 첫 페이지의 그 아름다운 문장을 다시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 문장이 롤리타를 불러내는 주문처럼 느껴졌지만, 마지막까지 읽고 난 뒤에는 오히려 돌로레스를 지워가는 주문처럼 들렸다. 이름을 반복해서 부를수록 한 사람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 사람을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 더 깊이 가두는 말. 그래서 내가 이 소설에서 끝내 배운 것은 아름다운 문장을 의심하라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문장이 너무 아름다울 때일수록, 나는 그 아름다움이 무엇을 비추고 있는지만큼이나 무엇을 어둠 속에 남겨두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읽는다는 것은 쓰인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쓰이지 못한 것의 자리를 찾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롤리타>에서 내가 끝까지 찾아야 했던 것도 험버트가 수없이 불러낸 ‘롤리타’가 아니라, 그 이름과 그 문장과 그 욕망 아래에서 좀처럼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없었던 돌로레스였다.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문학동네 펴냄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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