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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상태: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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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지음
민음사 펴냄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시지프 신화>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다시 읽으면서 나는 카뮈가 왜 하필 여기서부터 철학을 시작했는지를 오래 생각했다. 존재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세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철학에는 언제나 더 거대하고 오래된 질문들이 있었을 텐데, 카뮈는 그 모든 것을 건너뛰고 삶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먼저 묻는다. 어쩌면 그에게 철학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일이기 전에,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살아 있기로 결정하지 않은 사람에게 진리도 존재도 결국은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시지프 신화>는 처음부터 사유에 관한 책이라기보다 결단에 관한 책처럼 읽혔다. 세계의 의미를 먼저 알아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보장되지 않는 세계에서 그럼에도 살아갈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는 것. 카뮈의 철학은 답을 찾아낸 뒤 삶으로 돌아오는 대신, 답이 없는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데서 시작한다.

부조리라는 말도 다시 읽으니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우리는 흔히 부조리를 세계 자체가 지닌 어떤 결함처럼 생각한다. 세상이 원래 불합리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이 고통받는다고. 하지만 카뮈에게 부조리는 세계 안에도, 인간 안에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를 요구하는 인간과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는 세계가 마주치는 순간, 그 사이에서 비로소 부조리가 태어난다.

나는 이 정의가 이상할 만큼 서늘하면서도 동시에 위로처럼 느껴졌다. 세계가 나를 속인 것도 아니고, 내가 무언가를 잘못 살아서 이런 감각에 도착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유를 묻고, 세계는 침묵한다. 부조리는 그 둘이 부딪칠 때 생기는 마찰에 가깝다. 그렇다면 삶이 부조리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반드시 삶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내가 아직 세계를 향해 질문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사람에게는 세계의 침묵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

시지프가 받은 형벌도 그런 시선으로 다시 보게 됐다. 신들이 그에게 내린 벌은 단순히 무거운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리는 노동이 아니었다. 더 잔인한 것은 그 노동의 결과가 매번 지워진다는 사실이었다. 정상에 도착하는 순간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방금까지의 노력은 처음부터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보다 고통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는 감각인지도 모른다. 힘든 일도 끝에 무언가가 남는다고 믿을 수 있다면 버틸 수 있다. 몸이 닳고 시간이 오래 걸려도 그것이 어딘가에 쌓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계속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매번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지프의 형벌은 바위의 무게보다, 자신의 노력이 끊임없이 무효가 되는 광경을 바라봐야 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카뮈는 바로 그 절망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뜻밖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 바위가 다시 산 아래로 굴러떨어진 뒤, 시지프가 그것을 향해 천천히 내려가는 시간. 나는 이 짧은 순간이 <시지프 신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대담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바위를 밀어 올리는 동안 시지프는 자신의 형벌 안에 갇혀 있다. 하지만 산을 내려가는 동안만큼은 잠시 그 형벌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의 운명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 그는 곧 다시 바위를 밀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일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순간의 의식은 더욱 중요해진다. 형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견딜 뿐이지만, 자신의 형벌을 끝까지 알고도 다시 그곳으로 걸어 내려가는 사람은 어느 순간 그 형벌보다 커진다.

여기서 카뮈가 말하는 자유는 상황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었다. 시지프는 바위를 없앨 수도 없고 산을 떠날 수도 없다. 신들의 판결을 뒤집을 수도 없다. 그에게 주어진 세계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하나 있다. 그 운명을 어떤 표정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이 지점에서 자유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자유를 흔히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상태, 원하지 않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카뮈에게 자유는 오히려 바꿀 수 없는 것을 정확히 바라본 뒤에도 자신의 태도를 세계에 넘겨주지 않는 데 가까웠다. 시지프는 바위를 선택하지 못했지만, 그 바위 앞에서 어떤 인간으로 남을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는 마지막 문장이 오래 남는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이 문장이 조금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끝없이 같은 노동을 반복하는 사람을 두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절망을 애써 낙관으로 바꾸려는 말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중요한 것은 ‘행복하다’보다 ‘상상해야 한다’ 쪽이었다. 카뮈는 시지프가 실제로 행복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그렇게 상상하라고 요구한다. 세계가 행복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세계에서도 자신의 삶을 끝내 세계의 판결에 맡기지 않겠다는 결단. 그 문장은 낙관이라기보다 반항에 가까웠다.

어쩌면 카뮈가 말하는 행복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바위가 이번에는 굴러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시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마음. 희망이 있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어도 살아가기로 정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시지프의 행복은 기쁨이라기보다 자신의 운명을 타인에게 넘겨주지 않는 마지막 존엄처럼 느껴졌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내가 반복하고 있는 것들을 떠올렸다. 아무리 해도 제자리인 것 같은 일들, 애써 쌓아 올렸는데 어느 순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들. 나는 그런 순간마다 쉽게 의미를 의심했다. 남는 것이 없다면 왜 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시지프를 생각하고 나니 의미라는 것이 반드시 바위가 정상에 남아 있는 데서만 생기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질 것이다. 어쩌면 삶에는 끝내 굴러떨어지는 바위들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히 붙잡아둘 수 없는 것, 매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 결국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고 쌓아 올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래도 산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우리는 안다.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도 다시 바위 앞에 선다.

어쩌면 카뮈가 끝내 말하고 싶었던 자유는 바로 그 순간에 있는지도 모른다. 바위가 굴러떨어지지 않는 삶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다시 손을 얹는 것. 아무 의미도 주어지지 않았기에, 끝내 그 반복을 자신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

바위는 매번 원점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을 다시 밀기로 결정하는 나는, 매번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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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마귀들에게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시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그 돼지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악령>의 문 앞에 놓인 이 누가복음의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을 무신론적 혁명사상을 악령에 빗댄 비교적 분명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은 뒤 다시 이 구절로 돌아오자 이상하게도 ‘귀신’보다 ‘돼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악령은 혼자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것은 반드시 누군가의 몸 안으로 들어가야 했고, 자신을 대신해 달리고 추락하고 죽어줄 육체가 필요했다. 악령에게는 언제나 숙주가 필요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스타브로긴이라는 인물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처음의 스타브로긴은 이상할 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붙잡는 외모와 거의 폭력적일 정도의 매력을 지녔지만, 정작 그의 내부에는 무엇 하나 확실하게 붙들린 것이 없다. 사랑도 신념도 죄책감도 혁명도 그를 끝까지 점유하지 못한다. 그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채 모든 것의 한가운데 서 있지만, 어느 것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그런데 <악령>에서 가장 많은 것을 움직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다.

샤토프는 한때 그에게서 민족과 신앙의 진리를 보았고, 키릴로프는 그와 나눈 사유를 자기 존재의 끝까지 밀어붙인다.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는 아예 스타브로긴을 자신이 만들 혁명의 얼굴로 세우려 한다. 모두가 같은 사람을 바라보지만, 각자가 보는 스타브로긴은 서로 다르다. 누군가는 그에게서 신을 보고, 누군가는 혁명을 보고, 누군가는 구원을 보고, 누군가는 자기 파멸을 정당화할 논리를 본다.

그래서 나는 스타브로긴이 악령을 퍼뜨리는 사람이라기보다, 악령들이 번갈아 깃들 수 있는 텅 빈 성소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중심을 어떤 믿음으로도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안에서 스타브로긴 자신을 본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결핍을 보았다. 그리고 그 결핍에 그의 얼굴을 붙여 신념이라 부르고, 사랑이라 부르고, 혁명이라 부르며 매달렸다.

그런 의미에서 스타브로긴의 카리스마는 빛이라기보다 거울에 가깝다.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의 욕망을 되비춘다. 그러나 거울은 그 어떤 상도 책임지지 않는다.

표트르 베르호벤스키가 스타브로긴에게 자신들의 ‘신’이 되어달라고 매달리는 장면은 이 기묘한 구조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표트르에게 필요한 것은 진짜 신념을 가진 지도자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기에 무엇으로든 꾸밀 수 있는 얼굴이다. 그는 스타브로긴의 공허를 자신의 야심으로 채운 뒤, 그 공허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려 한다.

그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악령>이 사상의 위험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은 언제나 지나치게 강한 신념만은 아니다. 때로는 신념이 사라진 자리가 더 위험하다. 확고한 사상은 적어도 무엇을 믿는지 말할 수 있고, 그렇기에 논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중심에는 반박할 문장조차 없다. 사람들은 그 빈자리에 저마다 원하는 것을 집어넣고, 자신이 집어넣은 것을 진실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렇게 보면 <악령>속 혁명은 하나의 사상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염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중심을 잃은 사람들이 서로의 공허 속으로 자기 결핍을 던지는 과정에 가깝다. 한 사람의 허무는 다른 사람의 야심을 깨우고, 누군가의 상처는 타인의 이론을 만나며, 이론은 다시 폭력의 명분이 된다. 악령은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사람마다 다른 얼굴을 쓰면서도, 빈 곳을 찾아 이동한다는 점에서만 서로 닮아 있다.

키릴로프의 사유도 그 연장선에서 보였다.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신성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를 자살에서 찾는다. 죽음마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인간은 더 이상 어떤 초월적 존재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섬뜩했던 것은 키릴로프의 이론 자체보다 그 이론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절대적인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 죽으려 했지만, 정작 그의 죽음은 표트르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 자기 의지의 절대성을 증명하려던 죽음이 타인의 계획 속 한 조각으로 편입되는 순간, 그의 자유는 처참한 역설이 된다.

나는 여기서 인간이 신의 자리를 비워둔 채 견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했다. 신을 밀어낸다고 해서 그 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어 있는 왕좌는 오히려 끊임없이 새로운 주인을 요구한다. 키릴로프는 그 자리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앉혔고, 표트르는 혁명을 앉혔으며, 샤토프는 민족과 신앙을 되돌려 놓으려 했다. 그리고 스타브로긴은 끝내 아무것도 그 자리에 앉히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잘못된 신을 믿는 일이 아니라, 아무것도 믿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비워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비어 있는 신전에는 언젠가 누군가가 들어온다.

그런 점에서 스테판 트로피모비치가 “아름다움 없이는 인류가 단 1분도 살아갈 수 없다”고 외치는 장면은 이상하리만큼 오래 남았다. 처음에는 시대에 뒤처진 지식인의 낭만적인 탄식처럼 보였지만, 소설의 끝에 가까워질수록 그 말이 오히려 <악령> 전체에 대한 반론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을 효용과 이념, 목적과 수단으로만 나누려는 세계에서 그는 끝내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아름다움을 붙잡는다.

왜 하필 아름다움이어야 했을까.

아마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몇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과 연민과 아름다움은 혁명처럼 역사를 바꾸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세계를 구원할 계획도 내놓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쓸모없는 것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의외로 자유가 아니라 계산이고, 계산이 끝난 자리에는 가장 쉽게 폭력이 들어선다.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살인은 어느새 논리의 결론이 된다.

그래서 <악령>의 수많은 죽음은 단순히 과격한 정치사상이 불러온 비극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 안에서 사랑과 아름다움, 책임과 신앙이 조금씩 빠져나간 뒤 남은 빈 공간이 무엇으로 채워지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공허는 오래 비어 있지 않는다. 우리가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 결정하지 않으면, 언젠가 다른 무언가가 들어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우리가 흔히 ‘카리스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오래 생각했다. 우리는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더 위험한 매혹은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생길지도 모른다.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기 모습을 보여주지만, 공허한 사람은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을 돌려준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스타브로긴이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는 태양이 아니라 검은 구멍에 가까웠다. 스스로 빛을 내지 않으면서도 주변의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휘게 만드는 존재. 사람들은 그에게서 무언가를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자기 안에 있던 것을 그에게 던지고 있었고, 마침내 자신이 던진 것에 이끌려 그의 주위를 돌다가 하나씩 추락했다.

그러고 나니 소설 첫머리의 돼지 떼가 다시 떠올랐다.

악령이 돼지들을 호수로 몰아넣었다는 사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악령이 들어갈 몸을 끝내 찾아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은 자기 안을 완전히 비워둔 채 살아갈 수 없다. 무엇도 믿지 않겠다는 결심조차 결국 하나의 믿음이 되고, 신을 몰아낸 자리에는 자유든 혁명이든 자아든 또 다른 절대자가 들어선다.

그래서 <악령>을 읽고 내가 두려워하게 된 것은 광신 그 자체보다 공허였다. 뜨겁게 무언가를 믿는 사람보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채 모든 것을 비추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매혹적인 빈자리. 악령은 어쩌면 우리를 설득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비워둔 자리를 발견하고, 그곳을 자기 자리로 삼는 것인지도 모른다.

악령 3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은이), 김연경 (옮긴이) 지음
민음사 펴냄

4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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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버트 험버트가 소설의 첫 페이지부터 ‘롤리타’라는 이름을 혀끝에서 굴리듯 부르는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이상할 만큼 오래 불편했다. 그 불편함은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든 것은, 그토록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문장이 지나치게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문장은 매끄럽고 재치 있으며 때로는 황홀할 만큼 정교하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자꾸만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지 감각 사이에 놓였다. 문장에는 감탄하면서도, 그 문장이 가리고 있는 현실에서는 눈을 돌리지 않아야 했다.

나는 여기서 아름다움과 진실이 반드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선한 것과 쉽게 연결하고, 세련된 언어를 지적인 것과, 지적인 것을 다시 진실한 것과 이어 붙이곤 한다. 그런데 <롤리타>는 그 익숙한 연결을 잔인할 정도로 끊어놓는다. 험버트의 언어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이 가리키는 곳에는 진실이 아니라 은폐가 있다. 그의 문장은 현실을 비추는 창이 아니라 현실 위에 드리운 얇고 화려한 커튼에 가깝다.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우리는 잠시 커튼의 무늬를 바라보다가, 그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잊을 뻔한다.

험버트는 자기 자신을 시인이자 예술가로 만들고, 자신의 욕망 역시 미학의 언어 안에 집어넣는다. 그는 폭력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한 어린아이를 자신의 환상 속에서 ‘님펫’이라는 신비로운 존재로 다시 만들어낸다. 나는 이 대목에서 언어가 단순히 현실을 설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지우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행위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행위의 윤곽도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지배를 사랑이라고 부르고, 착취를 운명이라고 부르고, 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아름다운 비극이라고 부르는 순간, 말은 현실을 가리키는 표지가 아니라 현실을 가리는 가면이 된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롤리타’가 아니라 오히려 ‘돌로레스’인지도 모른다. 롤리타는 험버트가 만들어낸 이름이다. 그가 욕망할 수 있도록 가공한 한 이미지의 이름이고, 실제 소녀의 삶 위에 덧씌운 허구의 이름이다. 반면 돌로레스는 그 환상 아래에 묻혀 있는 한 인간의 이름이다. 나는 험버트가 그녀를 계속 롤리타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이름을 빼앗는 것이 한 사람의 현실을 빼앗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돌로레스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자기 욕망에 맞는 형상을 하나 만들어 그 위에 ‘롤리타’라는 이름을 붙인 뒤, 그 형상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이 소설의 일인칭 서술 자체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험버트는 돌로레스의 삶을 지배했을 뿐 아니라, 그녀를 기억하는 방식까지 지배한다. 독자가 사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창문은 험버트의 목소리이고, 그 창문의 유리에는 이미 그의 욕망과 자기연민과 미학이 짙게 칠해져 있다. 돌로레스의 목소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갇혀 있다. 그녀가 울고,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평범한 또래의 삶을 갈망했던 순간들은 험버트의 화려한 문장 사이에서 잠깐씩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그의 서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을수록 험버트가 하는 말을 읽기보다, 그가 말하지 않는 것을 읽게 됐다.

어쩌면 나보코프가 험버트에게 이토록 매혹적인 언어를 쥐여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만약 험버트가 처음부터 조악하고 혐오스러운 언어만을 사용하는 인물이었다면, 우리는 너무 쉽게 그를 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사람은 나와 전혀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안전한 거리에서 그를 비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롤리타>는 그런 안전한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험버트는 지적이고 재치 있으며, 자신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아름답게 설명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독자는 그의 논리가 아니라 그의 문장에 마음을 내어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바로 그 순간 이 소설의 함정이 닫힌다. 험버트에게 설득당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의 행동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때로 설득은 훨씬 조용하게 일어난다. 한 인간의 고통보다 그것을 묘사한 아름다운 문장을 먼저 바라보게 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시선의 방향을 빼앗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롤리타>가 욕망에 관한 소설인 동시에 독서에 관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을 때 언제나 말하는 사람의 눈을 빌린다. 그러나 누군가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보지 않기로 한 것까지 함께 보지 못하게 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하다. 험버트의 시선만 따라가면 돌로레스는 영원히 롤리타로 남는다. 그 시선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그 이름 뒤에 한때 살아 있었던 아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책을 덮고 나서도 나는 첫 페이지의 그 아름다운 문장을 다시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 문장이 롤리타를 불러내는 주문처럼 느껴졌지만, 마지막까지 읽고 난 뒤에는 오히려 돌로레스를 지워가는 주문처럼 들렸다. 이름을 반복해서 부를수록 한 사람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 사람을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 더 깊이 가두는 말. 그래서 내가 이 소설에서 끝내 배운 것은 아름다운 문장을 의심하라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문장이 너무 아름다울 때일수록, 나는 그 아름다움이 무엇을 비추고 있는지만큼이나 무엇을 어둠 속에 남겨두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읽는다는 것은 쓰인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쓰이지 못한 것의 자리를 찾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롤리타>에서 내가 끝까지 찾아야 했던 것도 험버트가 수없이 불러낸 ‘롤리타’가 아니라, 그 이름과 그 문장과 그 욕망 아래에서 좀처럼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없었던 돌로레스였다.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문학동네 펴냄

22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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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아담이 되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타락한 천사가 되어버렸습니다.”

괴물이 빅터에게 이 말을 건네는 대목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는 자신을 처음부터 악마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은 원래 아담이어야 했다고, 창조자의 손에서 막 태어나 아무것도 미워할 줄 몰랐던 최초의 인간이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담에게는 자신을 바라봐주는 신이 있었고, 그에게는 눈을 뜨는 순간 등을 돌린 창조자만 있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자신의 악을 변명하는 말이라기보다, 자신이 어떻게 악에 도달했는지를 되묻는 문장처럼 읽혔다. <프랑켄슈타인>이 끝내 묻는 것도 괴물은 왜 악한가가 아니라, 한 존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에 더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빅터의 가장 큰 죄는 생명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생명이 눈을 뜬 이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지성과 열정을 쏟지만, 정작 자신이 만든 존재가 첫 숨을 내쉬자 공포에 질려 달아난다. 그 장면을 읽으며 나는 창조에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책임이 따라붙는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를 세상에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시작의 원인이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이 자신의 손을 떠난 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지까지 어느 정도 감당하겠다는 약속에 가깝다. 그러나 빅터는 창조의 황홀만 원했을 뿐, 그 뒤에 따라오는 시간은 원하지 않았다. 씨앗을 땅에 묻고 싹이 트는 순간 땅을 버린 셈이다. 그리고 그 버려진 자리에서 자란 것이 결국 괴물의 분노였다.

그래서 숲속 오두막에서 인간 가족을 몰래 바라보며 말과 감정을 배우는 괴물의 모습은 더욱 처연하다. 그는 처음부터 증오를 배운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추위에 떨면 장작을 가져다놓고, 가족이 서로를 위로하면 그 모습을 보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익힌다. 그는 인간에게서 인간다움을 배웠고, 자신도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가 오랜 시간 익혀온 언어와 선의와 다정함은 얼굴 하나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의 내면에 쌓인 모든 것은 외모라는 한 장의 문 앞에서 멈춰 선다.

나는 이 장면에서 괴물이 태어나는 두 번째 순간을 본 것 같았다. 첫 번째 탄생이 빅터의 실험실에서 육체를 얻은 순간이었다면, 두 번째 탄생은 인간들의 눈 속에서 자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배운 순간이었다. 사람은 혼자서만 자신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배운다. 아무리 사랑받고 싶어 하는 존재라 해도 세상이 계속해서 너는 사랑받을 수 없는 모습이라고 대답한다면, 어느 순간 그는 그 대답을 자기 안으로 들여놓을지도 모른다. 괴물의 흉측한 얼굴보다 더 끔찍한 것은 어쩌면 그 얼굴을 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되돌려준 공포였을 것이다. 거울은 얼굴을 비출 뿐이지만, 타인의 시선은 때때로 한 존재의 운명까지 비춘다.

그렇다고 그의 살인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소설은 악을 이해하는 일과 악을 용서하는 일이 서로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괴물의 폭력은 분명 그의 것이지만, 그 폭력이 자라날 수 있었던 토양까지 온전히 그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버려짐과 모욕, 외로움과 거절이 켜켜이 쌓이면서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은 조금씩 사랑할 수 없다면 두려움이라도 주겠다는 욕망으로 뒤집힌다. 처음에는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기를 바라던 존재가, 끝내 그 손으로 누군가의 목을 조르게 되는 것이다. 그 변화를 지켜보고 있으면 악이란 처음부터 심장 속에 박혀 있는 검은 돌이라기보다, 오래 방치된 상처 위에 서서히 자라나는 딱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빅터와 괴물이 서로를 쫓아 얼어붙은 극지까지 가는 후반부는 두 사람이 점점 서로를 닮아가는 과정처럼 보였다. 창조자는 자신이 만든 생명을 없애기 위해 삶 전체를 걸고, 피조물은 자신을 버린 창조자를 파괴하는 데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건다. 한 사람은 괴물을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괴물이 되었지만, 마지막에는 누가 누구의 삶을 만들어낸 것인지조차 흐릿해진다. 그들은 서로를 가장 증오하면서도 서로 없이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마치 서로 등을 돌린 채 같은 사슬의 양 끝을 잡고 있는 것처럼, 멀어지기 위해 달릴수록 오히려 더 단단하게 묶인다.

이 관계를 보고 있으면 나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말까지 떠올리게 된다. 물론 빅터와 괴물의 관계를 단순히 부모와 자식으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처음 요구한 것이 거창한 구원이나 권력이 아니라 자신을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는 점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자신도 이 세계에 있어도 되는 존재라고 단 한 번만 말해달라는 요구. 그러나 빅터는 끝내 그 말을 해주지 못한다.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처럼, 괴물을 가장 깊게 망가뜨린 것은 빅터의 증오보다도 처음부터 그를 자신의 책임 밖으로 밀어내려 했던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빅터가 죽은 뒤, 괴물이 그의 시신 앞에서 울며 자신 역시 사라지겠다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 비극은 이상할 만큼 조용해진다. 복수는 끝났지만 아무것도 회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복수의 대상이 사라지고 나서야 괴물은 자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존재가 자기 삶을 붙들고 있던 마지막 끈이었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미움조차 관계의 한 형태였다. 빅터는 괴물을 통해 자신의 죄를 보았고, 괴물은 빅터를 통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확인했다. 서로를 없애려 했던 두 존재가 실은 서로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소설에서 가장 잔인한 역설처럼 느껴졌다.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 남은 것은 결국 책임이라는 단어였다.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순간에는 쉽게 사랑을 말한다. 아이를 낳고, 작품을 만들고, 관계를 시작하고, 어떤 생각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러나 창조보다 훨씬 긴 것은 그 이후의 시간이다. 시작은 한순간이지만 책임은 그 시작이 만들어낸 시간이 끝날 때까지 따라온다. 어쩌면 빅터가 감당하지 못한 것도 바로 그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문득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생각한다. 오늘날 그 이름은 흔히 괴물을 가리키는 말처럼 쓰이지만, 정작 소설 속에서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그를 만들어낸 사람의 이름이다. 나는 이 오래된 착각이 이상할 만큼 이 작품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눈앞에 나타난 흉측한 결과에는 쉽게 이름을 붙이면서, 그 결과를 낳은 원인은 자주 잊는다. 괴물이 나타나면 괴물을 손가락질하지만, 그를 만들고 버린 손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을 다 읽고 나면 괴물의 얼굴보다 빅터의 등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 자신이 만들어낸 생명이 처음 눈을 뜨던 순간, 그 생명을 향하지 않고 반대편으로 달아나던 한 인간의 등을. 어쩌면 괴물은 그 순간 이미 완성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험대 위에서가 아니라, 창조자가 뒤돌아선 바로 그 자리에서.

프랑켄슈타인

M.셀리 지음
문학동네 펴냄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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