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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세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민음사 펴냄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첫머리에 놓인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저 소설의 종교적 분위기를 암시하는 문장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긴 이야기를 지나 마지막 장에 이르고 나니, 오히려 이 거대한 소설 전체가 한 알의 밀알에서 자라난 것처럼 느껴졌다. 땅에 떨어지기를 거부한 채 끝내 하나의 씨앗으로 남는 삶과, 스스로의 껍질이 깨지고 흙 속에서 썩어감으로써 비로소 다른 생명을 낳는 삶.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 집안의 네 남자를 통해 끝없이 되묻는 것은 결국 이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을 지키는 동안 살아 있는가, 아니면 자신을 내어주는 순간에야 비로소 살아가기 시작하는가.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끝내 자신의 껍질을 깨뜨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방탕과 탐욕도 끔찍하지만, 내가 그에게서 더 근본적인 결핍을 느낀 것은 그가 평생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준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돈도, 사랑도, 책임도 아꼈고, 아버지라면 마땅히 건넸어야 할 최소한의 온기조차 자식들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곁에 있었지만 그는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다. 관계란 결국 내 안의 한 자리를 타인에게 내어주는 일인데, 표도르는 자신의 내부를 끝까지 봉쇄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이상할 만큼 갑작스러운 비극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육체의 죽음이 오기 훨씬 전부터 그는 이미 자기 안에서 말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삶 속에도 스며들지 못하고, 누구의 기억 속에서도 따뜻한 형태로 자라나지 못한 사람. 씨앗은 본래 작지만 그 안에 숲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러나 껍질이 끝내 깨지지 않는다면 그 가능성은 영원히 가능성으로만 남는다. 표도르는 그렇게 한 알인 채로 자신을 보존했고, 바로 그 보존 때문에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그의 아들들은 모두 이 메마른 씨앗의 자식들이지만,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굳어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깨지고, 각기 다른 흙 속으로 떨어진다.
드미트리는 가장 격렬하게 부서지는 사람이다. 그는 욕망도 사랑도 증오도 억누르지 못한 채 온몸으로 살아간다. 그의 삶에는 언제나 지나친 열기가 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피운 불길에 가장 먼저 데인다.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음에도 아버지 살해범으로 몰리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까지 짊어지게 되면서 그는 비로소 이전의 자신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드미트리의 변화가 인상적인 것은 그것이 깨달음보다 먼저 파괴의 형태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낮은 곳을 선택하지 않는다. 삶이 먼저 그를 끌어내려 바닥에 내던지고, 그제야 그는 자신 안에 아직 다른 인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래서 나는 그를 보며 씨앗이 땅에 떨어지는 일이 반드시 숭고하거나 자발적인 선택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사랑 때문에 자신을 내어주지만, 어떤 사람은 고통에 떠밀려 비로소 자기 껍질을 잃는다. 인간은 때때로 원하지 않았던 불행 속에서 이전의 자신을 잃고, 바로 그 상실을 통과하며 다른 존재가 된다.
드미트리에게 중요한 것은 억울하게 고통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이 그를 어디로 데려가는가에 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 앞에서도 처음으로 자기 삶 전체의 무게를 돌아본다. 법정에서 심판받는 죄와 인간이 스스로 짊어지는 죄가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사실도 그를 통해 선명해진다. 무죄인 사람이 죄인이 될 수 있고, 죄를 저지른 사람이 오히려 한 번도 자기 죄를 바라보지 않을 수도 있다. 드미트리는 바로 그 어긋남 속에서, 법이 아닌 양심의 자리로 조금씩 내려간다.
이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밀어붙인다. 드미트리가 삶의 격정 속에서 부서진다면, 이반은 자신의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인 끝에 그 사유가 자신을 향해 되돌아오는 순간과 마주한다.
이반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이 소설에서 가장 정직한 인물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무고한 아이의 고통 앞에서 너무 쉽게 화해하지 않는다. 훗날 완성될 조화와 구원을 위해 지금 여기의 한 아이가 고통받아야 한다면, 그는 그런 세계의 입장권을 돌려주겠다고 말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납득이다. 신의 섭리라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고통을 덮어버리는 대신,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끝까지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려 한다.
그런 점에서 이반의 반항은 매혹적이다. 그는 세계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인간이 흔히 믿음이나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덮어두는 질문을 끝까지 파고든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질문이 너무 깊어져 마침내 자신이 서 있던 땅마저 허물어버린다는 데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한 뒤에도 인간은 살아야 하고, 모든 근거를 무너뜨린 뒤에도 누군가는 다음 날 아침 눈을 떠야 한다. 그런데 이반은 무엇을 부정해야 하는지는 알았지만, 부정한 뒤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는 끝내 붙잡지 못한다.
스메르쟈코프는 바로 그 틈에서 등장한다. 이반에게 하나의 사유였던 것이 스메르쟈코프에게는 하나의 허가처럼 받아들여진다.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던 가능성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 그것은 현실의 피와 결합한다. 이반이 무너지는 이유는 단순히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타인의 손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형태로 자라났다는 사실, 자신이 뿌린 적 없다고 믿었던 씨앗이 어느새 다른 사람의 내부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목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반을 통해서는 생각 역시 씨앗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가 내뱉은 말과 사유는 우리 곁을 떠난 뒤 더 이상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떨어져 전혀 다른 모양으로 자랄 수 있다. 어떤 생각은 누군가를 살리고, 어떤 생각은 누군가에게 면죄부가 된다. 씨앗은 자신이 떨어질 흙을 고르지 못하고, 생각 역시 자신이 어떤 사람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지 끝까지 통제할 수 없다.
그에 비하면 알료샤의 길은 너무 조용해서 처음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는 드미트리처럼 삶과 격렬하게 충돌하지도 않고, 이반처럼 세계의 근본을 논리로 파헤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끝까지 읽고 나면 오히려 가장 깊이 땅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알료샤라는 생각이 든다.
조시마 장로의 죽음은 그에게도 하나의 균열이었다. 성자의 육체가 기적 대신 부패의 냄새를 풍기는 순간, 그가 믿어온 세계는 잠시 흔들린다. 믿음은 관념 속에서는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지만, 인간의 몸과 죽음 앞에서는 더 이상 추상적인 채로 남을 수 없다. 흙과 부패를 통과하지 않는 신앙은 아직 땅에 닿지 않은 신앙인지도 모른다.
알료샤가 그 위기를 지나 향하는 곳이 더 높은 곳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낮고 평범한 자리라는 점이 그래서 중요하게 느껴졌다. 그는 아이들의 다툼과 슬픔 속으로 들어가고, 그들과 함께 한 아이의 죽음을 견딘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 설명하기보다 곁에 머문다. 거대한 진리를 말하는 대신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을 한 순간을 만든다.
특히 일류샤의 장례식 뒤 아이들에게 건네는 말은 이 소설 전체가 마지막에 도달한 자리처럼 느껴졌다. 알료샤는 그들에게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조차 거창하게 설파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지금 함께 나눈 좋은 기억 하나를 오래 간직하자고 말한다. 언젠가 서로 멀어지고, 삶이 우리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놓더라도, 한때 우리가 서로를 사랑했던 순간을 기억한다면 그 기억 하나가 우리 안의 무언가를 끝까지 지켜줄지도 모른다고.
그 장면에 이르러서야 나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게 됐다. 열매는 반드시 업적이나 신념, 거대한 사상의 형태로 남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오래도록 품고 살아갈 기억 하나, 타인을 조금 덜 미워하게 만드는 한순간, 삶이 무너질 때 다시 붙잡을 수 있는 작은 온기 역시 열매가 될 수 있었다.
알료샤는 자신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오히려 가장 멀리 퍼져나간다. 그는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심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타인의 삶 속에 들어갈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 아주 작은 흔적을 남긴다. 씨앗은 사라졌는데 그 자리에 무엇인가가 자란다. 어쩌면 복음서의 밀알이 말하는 죽음은 바로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던 방식이 끝나는 것.
세 형제를 나란히 놓으면 그래서 같은 ‘떨어짐’조차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드미트리는 고통에 의해 땅으로 내던져지고, 이반은 자신의 사유가 예상하지 못한 땅에서 자라나는 것을 보며 무너진다. 알료샤는 스스로 낮아져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지만, 그 벗어남이 맺는 열매는 같지 않다.
이 지점에서 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말하는 구원을 단순히 종교적인 믿음의 문제로만 읽기 어려워졌다. 어쩌면 이 소설이 묻는 것은 무엇을 믿느냐보다, 인간이 어디까지 자기 자신을 놓아줄 수 있느냐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 안의 한 자리를 타인에게 내어주는 일이고, 책임진다는 것은 나의 자유 일부를 기꺼이 포기하는 일이며,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내 삶의 일부를 영구히 점유당하는 일이다.
관계는 결국 서로의 경계를 조금씩 허무는 일이다. 아무에게도 상처받지 않으려면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완벽하게 지켜낸 자아는 아무것과도 섞이지 않고,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 씨앗에게 껍질은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단단한 방패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씨앗인 채로 붙잡아두는 감옥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소설을 덮고 난 뒤 내게 남은 질문은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보다 조금 더 불편한 것이었다.
나는 무엇을 잃지 않으려고 이토록 단단하게 나를 움켜쥐고 있는가.
우리는 흔히 자신을 지키는 것이 살아남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덜 사랑하면 덜 다치고, 덜 내어주면 덜 잃으며, 누구에게도 깊이 기대지 않으면 무너질 일도 줄어든다고 믿는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을 조금씩 단단하게 만든다. 그러나 씨앗에게 완전한 보존은 곧 완전한 불모이기도 하다. 껍질이 깨지지 않는 한 씨앗은 안전하다. 다만 영원히 씨앗일 뿐이다.
어쩌면 인간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살아 있다는 것은 자신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일이 아니라 조금씩 잃어가는 일에 더 가까울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이전의 자신을 잃고, 책임을 짊어지며 자유의 일부를 잃고, 고통을 지나며 자신이 믿었던 확신을 잃는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부서지면서도, 바로 그 틈으로 다른 사람이 들어오고 새로운 삶이 싹튼다.
그래서 이제 나는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죽음에 관한 말로만 읽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오히려 삶이 어떻게 자신을 넘어서는가에 관한 문장처럼 느껴진다. 한 알의 밀알이 땅속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한 알의 밀알로 남아 있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아니었던 것들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나서 내가 두려워하게 된 것도 죽음이나 소멸이 아니었다. 끝내 아무 데에도 묻히지 못하는 삶이었다. 누구에게도 스며들지 못하고, 어떤 사랑에도 나를 내어주지 않은 채, 완벽하게 나 자신으로만 남아버리는 것.
어쩌면 한 알의 밀알에게 가장 비극적인 운명은 썩는 것이 아니라, 끝내 깨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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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