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 알마 펴냄

사탄탱고

이 책을 읽은 사람

나의 별점

읽고싶어요
19,800원 10% 17,820원

책장에 담기

게시물 작성

문장 남기기

분량

두꺼운 책

출간일

2018.5.9

페이지

412쪽

상세 정보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장편소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고골, 멜빌과 같은 대문호와 자주 비견되며 매년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다. <사탄탱고>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헝가리의 작가주의 영화감독이자 전 세계 영화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거장 벨라 타르에 의해 1994년에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공산주의가 붕괴되어가던 1980년대 헝가리. 해체된 집단농장의 마을에 남아 가난과 불신의 늪에 빠져 무기력한 삶을 보내던 이들 사이에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1년 반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리미아시가 마을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그가 가을장마의 시작과 함께 귀환한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은 절망적인 삶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달콤한 꿈에 부푸는 한편, 무언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종 없이 들려오는 종소리와 보이지 않는 거미들이 친 거미줄이 세계의 몰락이라는 공포를 부추긴다. <사탄탱고>는 몰락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끝내 쳇바퀴에 다시 포박되어 영원한 악순환을 이루는 과정을 절망의 묵시화로 그려낸다.

상세 정보 더보기

이 책을 언급한 게시물15

이수민(상태:카뮈)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수민(상태:카뮈)

@smlee682

<사탄탱고>라는 제목은 이상할 만큼 매혹적이다. 사탄과 탱고. 하나는 추락을 떠올리게 하고, 다른 하나는 춤을 떠올리게 한다. 파멸과 리듬, 저주와 관능, 어둠과 움직임.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붙어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보다 더 정확한 제목은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파멸이라는 것은 보통 끝을 향해 곧장 추락하는 이미지로 떠오르지만, 이 소설에서 파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사람을 천천히 회전시키고, 자신이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든다. 어쩌면 가장 완벽한 몰락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춤추고 있다고 믿으며 같은 바닥을 맴도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대개 절망을 멈춰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것,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그런데 <사탄탱고>의 절망은 오히려 계속 움직인다. 사람들은 떠나고, 기다리고, 믿고, 따라가고, 다시 흩어진다. 끊임없이 움직이는데도 아무 데도 도착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절망은 늪보다 춤에 가깝다. 늪은 몸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지만, 춤은 계속 움직이게 하면서도 결국 같은 바닥 위에 머물게 한다. 어쩌면 사람에게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보다, 움직이고 있는데도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발은 분명 움직이고 있고 몸도 방향을 바꾸는데, 음악이 끝나갈 무렵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면 처음과 거의 같은 자리다. 조금 전 자신이 밟았던 바닥을 다시 밟고 있고, 벗어났다고 믿었던 원 안으로 어느새 돌아와 있다. 나는 그게 삶과 조금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자주 앞으로 가고 있다고 믿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고, 다시 시작하고, 이번에는 정말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뒤를 돌아보면 이상하리만큼 비슷한 장면들이 반복되어 있을 때가 있다. 다른 얼굴을 사랑하면서 같은 방식으로 상처받고, 다른 선택을 하면서도 비슷한 후회를 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자리로 조금 다른 길을 통해 돌아온다.

삶은 어쩌면 직선인 척하는 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 사이에 선을 긋지만, 실은 그 선이 조금씩 휘어져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번 그것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부른다. 아마 인간은 반복을 견디기 위해 그 반복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실패를 경험이라 부르고, 되돌아감을 성찰이라 부르고, 다시 시작하는 일을 희망이라고 부르면서 같은 원을 조금 덜 절망적으로 살아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 소설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절망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희망이었다. 절망한 사람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무엇보다 간절하게 무언가를 기다린다. 지금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지금과 다른 곳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고, 바로 그 믿음 속에 구원자가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이리미아시는 그 빈자리를 알아본 사람이다. 나는 그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희망은 이미 그들 안에 있었다. 다만 너무 오래 굶은 희망이라서, 무엇이든 먹어치울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희망이 반드시 밝은 감정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희망은 사람을 살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눈가리개가 되기도 한다. 지금 이곳이 견딜 수 없을수록 사람은 어딘가에 다른 세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싶어진다. 그 믿음이 충분히 커지면 중요한 것은 그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지가 아니라, 그것을 약속해줄 사람이 있는지가 된다. 그렇게 구원은 사실보다 먼저 필요가 되고, 필요는 판단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을 점령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리미아시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충분히 확인한 뒤 그를 믿은 것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그를 믿고 싶어 했다. 자신들을 어디든 데려가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필요가 의심보다 컸다. 그래서 이리미아시가 무서운 것은 그가 뛰어난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다. 그가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빼앗을 수 있는지를 너무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빼앗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스스로 내놓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내놓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구원의 대가라고 믿게 하면 된다.

에슈티케의 죽음을 두고 이리미아시가 마을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장면에서 나는 그 생각을 오래 했다. 죄책감은 참 이상한 감정이다. 마음 안에 생기는 감정인데도 때로는 타인이 그 크기를 정한다. 누군가가 계속해서 “너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면, 어느 순간 실제 잘못보다 그 문장의 무게가 더 커지기도 한다. 이리미아시는 바로 그 무게를 이용한다. 그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먼저 죄인으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그 죄에서 빠져나갈 길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죄책감을 덜어주는 대신 더 깊이 밀어 넣은 다음, 그 구덩이 위에서 손을 내민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죄책감과 구원이 서로 아주 가까운 감정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믿는 순간, 단지 용서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전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욕망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구원은 가장 정교한 통제가 된다. “너는 잘못했다”는 말보다 더 강한 것은 “하지만 나를 따르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죄를 지적하는 사람보다, 죄 이후의 삶을 독점적으로 약속하는 사람이 더 위험한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구원은 빛이라기보다 미끼에 가깝다. 멀리서 보면 반짝이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절실해진다. 손을 뻗는 순간에는 내가 그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먼저 그것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점에서 ‘사탄’이라는 말이 단순히 악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다. 사탄은 사람을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존재라기보다, 스스로 그쪽으로 걸어가게 만드는 존재에 가까운 것 아닐까. 파멸을 파멸처럼 보이게 하지 않고 구원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사람에게 족쇄를 채우는 대신 그것을 스스로 선택한 발걸음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

어쩌면 악은 폭력보다 유혹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폭력은 적어도 자신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지만, 유혹은 내가 원하는 것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내가 바라는 말을 해주고, 내가 듣고 싶은 미래를 보여주고, 내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게 만든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것은 누군가가 나를 속이는 순간이 아니라, 내가 속고 싶어지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거짓말은 밖에서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탱고 역시 단순한 춤이 아니다. 탱고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를 붙들고 움직인다. 내가 상대를 이끄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상대에게 끌려가고, 밀어내는 동작과 끌어당기는 동작이 하나의 춤 안에 이어진다. 누가 누구를 움직이는지 경계가 흐려진다. 이리미아시와 마을 사람들의 관계도 그와 비슷해 보였다. 그가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를 구원자로 만든 것은 사람들의 욕망이다. 그들이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면 그의 말도 아무 힘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악은 때로 혼자 춤추지 못한다. 그 악을 믿고 싶은 마음, 거기에 몸을 맡기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춤이 시작된다.

그래서 <사탄탱고>라는 제목은 점점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사탄이 억지로 사람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춤에서 아무도 완전히 피해자이거나 완전히 구경꾼일 수는 없다. 인간은 때로 자신을 파괴하는 것에조차 리듬을 부여하고, 그 리듬에 익숙해지는 순간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반복되는 불행이 무서운 이유는 불행 그 자체보다, 그것이 익숙해진 뒤부터는 더 이상 불행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설 끝에서 의사가 다시 등장했을 때 나는 그 생각을 더 오래 붙잡게 됐다. 의사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마을을 떠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따라가지도 않고, 구원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는 창밖을 보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적는다. 처음에는 그가 원 밖에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춤추고 있을 때 혼자 벽에 기대어 그 춤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그가 다시 문장을 쓰기 시작하고, 그 문장이 우리가 처음 읽었던 세계로 이어지는 순간, 나는 그 역시 원 밖에 있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춤추지 않는 대신 기록한다. 사람들은 몸으로 원을 그리고, 의사는 문장으로 원을 그린다. 누군가는 같은 선택을 반복하고, 누군가는 그 반복을 바라보며 같은 이야기를 다시 쓴다. 결국 둘 다 원 안에 있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면 기록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복을 적어놓는다고 해서 반복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절망을 이해한다고 해서 절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계속 바라보고, 이름 붙이고, 문장을 만든다. 어쩌면 이해한다는 행위도 하나의 춤인지 모른다. 우리는 어떤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만, 이해하려고 자꾸 돌아보다 보면 다시 그 상처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기억을 끝내려고 이야기하지만, 이야기하는 동안 오히려 그것을 다시 살아내기도 한다. 기억과 기록 역시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는다. 다시 돌아가고, 반복하고, 같은 곳을 맴돈다.

그렇다면 기억은 과거를 보관하는 창고라기보다, 같은 장면을 계속 다른 빛 아래로 불러오는 방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억을 떠올릴 때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으로 그 과거를 다시 만든다. 그래서 같은 일을 수십 번 떠올려도 매번 조금 다른 이야기로 남는다. 기억은 반복되지만 똑같이 반복되지 않고, 기록은 같은 원을 그리면서도 매번 아주 조금씩 다른 궤적을 남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반복’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 반복은 단순히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같은 장소로 돌아와도 완전히 같은 사람이 아니다. 같은 상처를 다시 겪더라도 이전과 똑같이 아픈 것은 아니고, 같은 사람을 떠올리더라도 그 기억을 바라보는 각도는 조금씩 달라진다. 원은 닫혀 있지만 그 원을 도는 사람은 계속 변한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다시 하면서도 매번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믿는지도 모른다.

그 믿음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계속해서 다음 스텝을 밟는 일이기 때문이다. 절망했다고 해서 음악이 멈추는 것은 아니고, 상처받았다고 해서 몸이 더는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시 누군가를 믿고, 다시 기대하고, 다시 실패하고, 또다시 조금 다른 리듬으로 같은 자리를 돈다. 어쩌면 인간은 탈출하는 존재라기보다 반복 속에서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사탄탱고>는 그 사실을 위로하지 않는다. “그래도 결국 나아질 것이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떤 삶은 정말로 원을 그릴 뿐이라고, 어떤 절망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며 살아지는 것이라고 보여준다. 나는 오히려 그 점이 좋았다. 모든 상처가 성장으로 이어진다고 말하지 않는 것, 모든 고통이 언젠가 의미가 될 거라고 약속하지 않는 것, 사람이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야만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한 냉정함. 가끔은 그게 값싼 희망보다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

책을 덮고 나는 내가 지나온 몇몇 장면을 떠올렸다. 다시는 기대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다시 기대했던 순간들,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예전과 똑같이 흔들렸던 순간들, 분명 멀리 떠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마음만은 오래전의 어느 자리로 되돌아가 있던 순간들. 그때마다 나는 내가 후퇴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싶어졌다. 뒤로 물러나는 스텝도 춤의 일부일 수 있고,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반드시 실패를 뜻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사람은 완벽한 직선을 그리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흔들리고 되돌아가고 다시 손을 내미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내게 희망은 화살표보다는 춤에 가깝다. 희망은 반드시 나를 더 먼 곳으로 데려가는 힘이 아니다. 같은 자리로 돌아온 뒤에도 다시 몸을 일으켜 다음 박자를 기다리는 힘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자유 역시 원 밖으로 도망치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자유는 내가 지금 춤추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에 생긴다. 누구의 손을 잡고 있는지, 어떤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있는지, 내가 정말 앞으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같은 자리를 돌고 있는지 문득 바라보는 순간.

그렇다고 음악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원도 여전히 닫혀 있다. 다만 그때부터 나는 아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다. 어쩌면 자유란 원을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그 원 안에서 어떤 스텝을 밟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능력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면, 그 안에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반복할지를 선택하는 일만은 아주 조금 남아 있을 테니까.

어쩌면 <사탄탱고>가 끝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미세한 차이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탄과 춤추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고, 어느 순간 그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알아차림 하나가 춤을 멈추지는 못하더라도, 다음 스텝의 방향을 아주 조금 바꾸어놓는다.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알마 펴냄

23시간 전
0
해씨님의 프로필 이미지

해씨

@haessi

  • 해씨님의 사탄탱고 게시물 이미지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알마 펴냄

읽었어요
3일 전
0
yks님의 프로필 이미지

yks

@yks0590

초반은 너무 불친절한 전개이다
무슨이야기인지 어떤 사건으로 흘러가는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이 진행되고 있다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하나씩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사건은 급하게 흘러가다
결국은 처음으로 돌아오고 마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조금 암울하다고 해야하나
망한 집단농장에서 가난하게 끝까지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공산당 끄나풀

약한 사람들은 언제나 이용만 당하고 가스라이팅당하고
그렇게 당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사는것이 행복한건가?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알마 펴냄

2주 전
0
집으로 대여
구매하기
지금 첫 대여라면 배송비가 무료!

상세정보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장편소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고골, 멜빌과 같은 대문호와 자주 비견되며 매년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다. <사탄탱고>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헝가리의 작가주의 영화감독이자 전 세계 영화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거장 벨라 타르에 의해 1994년에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공산주의가 붕괴되어가던 1980년대 헝가리. 해체된 집단농장의 마을에 남아 가난과 불신의 늪에 빠져 무기력한 삶을 보내던 이들 사이에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1년 반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리미아시가 마을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그가 가을장마의 시작과 함께 귀환한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은 절망적인 삶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달콤한 꿈에 부푸는 한편, 무언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종 없이 들려오는 종소리와 보이지 않는 거미들이 친 거미줄이 세계의 몰락이라는 공포를 부추긴다. <사탄탱고>는 몰락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끝내 쳇바퀴에 다시 포박되어 영원한 악순환을 이루는 과정을 절망의 묵시화로 그려낸다.

출판사 책 소개

2015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
영화 〈사탄탱고〉 원작 소설
절망의 태양 아래 그들은 춤을 춘다, 영원의 원 안에서 유희를 벌이며…

2015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 작가이자
헝가리 현대문학의 대가가 쓴 전설적인 작품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장편소설 〈사탄탱고〉가 알마에서 출간됐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고골, 멜빌과 같은 대문호와 자주 비견되며 매년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다. 〈사탄탱고〉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헝가리의 작가주의 영화감독이자 전 세계 영화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거장 벨라 타르에 의해 1994년에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공산주의가 붕괴되어가던 1980년대 헝가리. 해체된 집단농장의 마을에 남아 가난과 불신의 늪에 빠져 무기력한 삶을 보내던 이들 사이에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1년 반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리미아시가 마을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그가 가을장마의 시작과 함께 귀환한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은 절망적인 삶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달콤한 꿈에 부푸는 한편, 무언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종 없이 들려오는 종소리와 보이지 않는 거미들이 친 거미줄이 세계의 몰락이라는 공포를 부추긴다. 〈사탄탱고〉는 몰락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끝내 쳇바퀴에 다시 포박되어 영원한 악순환을 이루는 과정을 절망의 묵시화(黙示畵)로 그려낸다.
〈사탄탱고〉의 출간은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을 열망해온 국내 독자들의 묵은 갈증을 해소할 굵직한 단비가 될 것은 물론, 문화계 전반에 엄청난 충격과 반가움을 선사할 것이다. 알마는 오랫동안 〈사탄탱고〉의 번역 출간을 기다려온 독자들을 위해 빨간색과 검정색으로 된 두 가지 버전의 특별한 표지를 선보인다.

현존하는 묵시록 문학의 최고 거장
그리고 예술가들의 예술가

국내에서는 생소할지도 모를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헝가리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재능과 고도의 역량을 갖춘 작가로 평가받는 그는 묵시록적인 주제와 정서를 특유의 기위(奇瑋)한 문체와 형식에 담은 작품으로 전 세계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그 독창적인 작품 세계와 작품성을 인정받아 다양한 헝가리 국내 및 국제 문학상을 받아오다 2015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자가 되었다.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같은 상을 받기 한 해 전의 일이다.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머리나 워너는 “크러스너호르커이는 강렬하면서도 독특한 음역을 가진 몽상가적 작가다. 그는 겁이 나고 낯설면서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웃긴 장면을 만들어낸다”고 평했다.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항시 언급되곤 하는 종말론적 성향에 관해 크러스너호르커이는 맨부커 수상 소감에서 “아마도 나는 지옥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독자들을 위한 작가인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수전 손택 또한 크러스너호르커이를 “현존하는 묵시록 문학의 최고 거장”으로 일컬었다. 수전 손택은 크러스너호르커이가 원작자로 참여한 영화 〈사탄탱고〉에 대해 “내 남은 생애 동안 매년 한 번씩은 반드시 보겠다”는 말로 상찬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평단과 예술인의 찬사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인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익히 알려진 대로 영화감독 벨라 타르의 전작(全作) 작업에 참여하는 등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다. 2018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국내 작가 한강과 함께 또다시 이름을 올렸다.

“클로드 시몽, 토마스 베른하르트, 주제 사라마구, W. G. 제발트, 로베르토 볼라뇨,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를 떠올려보아도, 크러스너호르커이가 가장 이상한 작가일 것이다.”_〈뉴요커〉
“카프카를 잇는 타고난 이야기꾼”_〈워싱턴포스트〉

악마와 추는 탱고,
앞으로 여섯 스텝 뒤로 여섯 스텝을 밟으며
굳게 닫힌 영원의 원(圓)을 이루다

어느 시월의 아침, 이제부터 끝없이 내릴 가을비의 첫 방울이 떨어지던 날, 후터키는 종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다. 교회도 종도 없는 곳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는 불길하고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것은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만 같은 징조로 느껴진다. 이후에 이어지는 일련의 소동극은 일견 우스꽝스럽지만 실은 집단농장의 공동체가 함께 일한 대가로 받은 공동의 삯을 일부가 갈취해 도피하려는 지저분한 음모의 과정이다. 실패한 집단농장의 마을에 남겨진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를 불신하며, 이미 몰락한 세계에 영혼의 기저까지 물들어 무력한 가운데 비열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친다. 그러다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온다는 소문이 돌자, 그 소식에 실린 불길한 기운과 다르게 마을은 이상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1년 반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이리미아시는 마음만 먹으면 소똥으로 성도 지을 수 있는 신비한 능력과 절대적인 카리스마의 소유자다. 절망에 빠져 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라 생각하며 도피를 포기한 채 그의 귀환을 기다린다. 마을을 되살려줄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내놓을 기세다.
그러나 소설은 카프카의 소설을 연상케 하는 초반부의 부조리극을 통해 이리미아시가 결코 구세주가 될 수 없는 인물임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그를 기다리며 사람들은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가난과 불안에 억눌리고 감춰져 있던 욕망을 비로소 들추어 꺼내고 그것에 취해 한바탕 탱고를 추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장밋빛 미래가 아닌 실패한 체제가 고안해낸 악랄한 도구로의 전락이자 뒤이을 세계의 타락이다. 작품 곳곳에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종소리와 거미줄은 마을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로 묶여 있고 한데 옭아매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적 장치일 테다. 하지만 폐허 속에 간신히 존재하는 종같이 그들의 공동체는 그 근원부터가 이미 존재의 의미를 잃은 채고, 다만 아무리 없애도 소리 없이 생겨나 모든 것을 뒤덮는 거미줄처럼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그들의 삶 위에 반투명한 유령으로 존재하며 하강하는 세계를 노래할 뿐이다.
이처럼 작가는 암울한 묵시록 문학의 대가답게, 헝가리 남동부의 버려진 집단농장 마을을 배경으로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던 사람들이 체제에 유린당하고 끝내는 고통의 원 안에 갇히고 마는 과정을 매혹적이고 무자비하게 그려냈다. 특히 작품의 제목에 들어가기도 한 ‘탱고’의 스텝, 즉 앞으로 여섯 스텝 그리고 뒤로 여섯 스텝의 형식에 맞춰 1부는 1장에서 시작해 6장으로, 2부는 역순으로 6장에서부터 시작해 1장으로 맺으며 하나의 원을 이루는 순환 구조의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각 장마다 등장인물의 시점을 달리하는 등의 형식 실험을 통해 고통의 악순환을 경이롭게 묘사했다.
작품 외적으로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을 꼽는다면 〈사탄탱고〉가 동구 공산권이 해체되기 전인 1985년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탄탱고〉의 번역자이자 시인인 조원규는 해설에서, 종말론적이고 묵시록적인 작품 성향을 가진 작가가 예견한 몰락은 아마도 정치적 저항의 표현이었을 거라며, 그럼에도 〈사탄탱고〉가 궁극적으로는 그리고자 한 것은 희망하는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탄탱고〉는 역사적으로 동구 공산권이 해체되기 이전인 1985년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아직 체제가 유지되던 동안에 작가가 그려낸 ‘몰락’은 정치적 저항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으리라. (...) 이 작품은 한 시기의 체제 비판을 넘어서 좀 더 항구적인, 희망하는 인간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한 문학으로 남았다고 할 수 있다. (‘해설’ 중에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대표작으로는 〈사탄탱고〉 외에도 〈저항의 멜랑콜리(The Melancholy of Resistance)〉(1989), 〈저 아래 서왕모(Seiobo There Below)〉(2008) 등이 있다. 알마에서는 그의 대표작을 순차적으로 국내에 소개할 예정이다.

무제한 대여 혜택 받기

현재 25만명이 게시글을
작성하고 있어요

나와 비슷한 취향의 회원들이 작성한
FLYBOOK의 더 많은 게시물을 확인해보세요.

지금 바로 시작하기

플라이북 앱에서
10% 할인받고 구매해 보세요!

지금 구매하러 가기

더 많은 글을 보고 싶다면?

게시물 더보기
웹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