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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알마 펴냄
<사탄탱고>라는 제목은 이상할 만큼 매혹적이다. 사탄과 탱고. 하나는 추락을 떠올리게 하고, 다른 하나는 춤을 떠올리게 한다. 파멸과 리듬, 저주와 관능, 어둠과 움직임.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붙어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보다 더 정확한 제목은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파멸이라는 것은 보통 끝을 향해 곧장 추락하는 이미지로 떠오르지만, 이 소설에서 파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사람을 천천히 회전시키고, 자신이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든다. 어쩌면 가장 완벽한 몰락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춤추고 있다고 믿으며 같은 바닥을 맴도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대개 절망을 멈춰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것,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그런데 <사탄탱고>의 절망은 오히려 계속 움직인다. 사람들은 떠나고, 기다리고, 믿고, 따라가고, 다시 흩어진다. 끊임없이 움직이는데도 아무 데도 도착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절망은 늪보다 춤에 가깝다. 늪은 몸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지만, 춤은 계속 움직이게 하면서도 결국 같은 바닥 위에 머물게 한다. 어쩌면 사람에게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보다, 움직이고 있는데도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발은 분명 움직이고 있고 몸도 방향을 바꾸는데, 음악이 끝나갈 무렵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면 처음과 거의 같은 자리다. 조금 전 자신이 밟았던 바닥을 다시 밟고 있고, 벗어났다고 믿었던 원 안으로 어느새 돌아와 있다. 나는 그게 삶과 조금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자주 앞으로 가고 있다고 믿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고, 다시 시작하고, 이번에는 정말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뒤를 돌아보면 이상하리만큼 비슷한 장면들이 반복되어 있을 때가 있다. 다른 얼굴을 사랑하면서 같은 방식으로 상처받고, 다른 선택을 하면서도 비슷한 후회를 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자리로 조금 다른 길을 통해 돌아온다.
삶은 어쩌면 직선인 척하는 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 사이에 선을 긋지만, 실은 그 선이 조금씩 휘어져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번 그것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부른다. 아마 인간은 반복을 견디기 위해 그 반복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실패를 경험이라 부르고, 되돌아감을 성찰이라 부르고, 다시 시작하는 일을 희망이라고 부르면서 같은 원을 조금 덜 절망적으로 살아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 소설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절망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희망이었다. 절망한 사람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무엇보다 간절하게 무언가를 기다린다. 지금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지금과 다른 곳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고, 바로 그 믿음 속에 구원자가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이리미아시는 그 빈자리를 알아본 사람이다. 나는 그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희망은 이미 그들 안에 있었다. 다만 너무 오래 굶은 희망이라서, 무엇이든 먹어치울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희망이 반드시 밝은 감정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희망은 사람을 살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눈가리개가 되기도 한다. 지금 이곳이 견딜 수 없을수록 사람은 어딘가에 다른 세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싶어진다. 그 믿음이 충분히 커지면 중요한 것은 그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지가 아니라, 그것을 약속해줄 사람이 있는지가 된다. 그렇게 구원은 사실보다 먼저 필요가 되고, 필요는 판단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을 점령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리미아시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충분히 확인한 뒤 그를 믿은 것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그를 믿고 싶어 했다. 자신들을 어디든 데려가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필요가 의심보다 컸다. 그래서 이리미아시가 무서운 것은 그가 뛰어난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다. 그가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빼앗을 수 있는지를 너무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빼앗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스스로 내놓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내놓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구원의 대가라고 믿게 하면 된다.
에슈티케의 죽음을 두고 이리미아시가 마을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장면에서 나는 그 생각을 오래 했다. 죄책감은 참 이상한 감정이다. 마음 안에 생기는 감정인데도 때로는 타인이 그 크기를 정한다. 누군가가 계속해서 “너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면, 어느 순간 실제 잘못보다 그 문장의 무게가 더 커지기도 한다. 이리미아시는 바로 그 무게를 이용한다. 그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먼저 죄인으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그 죄에서 빠져나갈 길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죄책감을 덜어주는 대신 더 깊이 밀어 넣은 다음, 그 구덩이 위에서 손을 내민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죄책감과 구원이 서로 아주 가까운 감정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믿는 순간, 단지 용서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전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욕망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구원은 가장 정교한 통제가 된다. “너는 잘못했다”는 말보다 더 강한 것은 “하지만 나를 따르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죄를 지적하는 사람보다, 죄 이후의 삶을 독점적으로 약속하는 사람이 더 위험한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구원은 빛이라기보다 미끼에 가깝다. 멀리서 보면 반짝이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절실해진다. 손을 뻗는 순간에는 내가 그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먼저 그것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점에서 ‘사탄’이라는 말이 단순히 악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다. 사탄은 사람을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존재라기보다, 스스로 그쪽으로 걸어가게 만드는 존재에 가까운 것 아닐까. 파멸을 파멸처럼 보이게 하지 않고 구원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사람에게 족쇄를 채우는 대신 그것을 스스로 선택한 발걸음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
어쩌면 악은 폭력보다 유혹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폭력은 적어도 자신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지만, 유혹은 내가 원하는 것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내가 바라는 말을 해주고, 내가 듣고 싶은 미래를 보여주고, 내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게 만든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것은 누군가가 나를 속이는 순간이 아니라, 내가 속고 싶어지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거짓말은 밖에서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탱고 역시 단순한 춤이 아니다. 탱고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를 붙들고 움직인다. 내가 상대를 이끄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상대에게 끌려가고, 밀어내는 동작과 끌어당기는 동작이 하나의 춤 안에 이어진다. 누가 누구를 움직이는지 경계가 흐려진다. 이리미아시와 마을 사람들의 관계도 그와 비슷해 보였다. 그가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를 구원자로 만든 것은 사람들의 욕망이다. 그들이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면 그의 말도 아무 힘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악은 때로 혼자 춤추지 못한다. 그 악을 믿고 싶은 마음, 거기에 몸을 맡기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춤이 시작된다.
그래서 <사탄탱고>라는 제목은 점점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사탄이 억지로 사람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춤에서 아무도 완전히 피해자이거나 완전히 구경꾼일 수는 없다. 인간은 때로 자신을 파괴하는 것에조차 리듬을 부여하고, 그 리듬에 익숙해지는 순간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반복되는 불행이 무서운 이유는 불행 그 자체보다, 그것이 익숙해진 뒤부터는 더 이상 불행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설 끝에서 의사가 다시 등장했을 때 나는 그 생각을 더 오래 붙잡게 됐다. 의사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마을을 떠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따라가지도 않고, 구원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는 창밖을 보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적는다. 처음에는 그가 원 밖에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춤추고 있을 때 혼자 벽에 기대어 그 춤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그가 다시 문장을 쓰기 시작하고, 그 문장이 우리가 처음 읽었던 세계로 이어지는 순간, 나는 그 역시 원 밖에 있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춤추지 않는 대신 기록한다. 사람들은 몸으로 원을 그리고, 의사는 문장으로 원을 그린다. 누군가는 같은 선택을 반복하고, 누군가는 그 반복을 바라보며 같은 이야기를 다시 쓴다. 결국 둘 다 원 안에 있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면 기록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복을 적어놓는다고 해서 반복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절망을 이해한다고 해서 절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계속 바라보고, 이름 붙이고, 문장을 만든다. 어쩌면 이해한다는 행위도 하나의 춤인지 모른다. 우리는 어떤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만, 이해하려고 자꾸 돌아보다 보면 다시 그 상처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기억을 끝내려고 이야기하지만, 이야기하는 동안 오히려 그것을 다시 살아내기도 한다. 기억과 기록 역시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는다. 다시 돌아가고, 반복하고, 같은 곳을 맴돈다.
그렇다면 기억은 과거를 보관하는 창고라기보다, 같은 장면을 계속 다른 빛 아래로 불러오는 방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억을 떠올릴 때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으로 그 과거를 다시 만든다. 그래서 같은 일을 수십 번 떠올려도 매번 조금 다른 이야기로 남는다. 기억은 반복되지만 똑같이 반복되지 않고, 기록은 같은 원을 그리면서도 매번 아주 조금씩 다른 궤적을 남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반복’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 반복은 단순히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같은 장소로 돌아와도 완전히 같은 사람이 아니다. 같은 상처를 다시 겪더라도 이전과 똑같이 아픈 것은 아니고, 같은 사람을 떠올리더라도 그 기억을 바라보는 각도는 조금씩 달라진다. 원은 닫혀 있지만 그 원을 도는 사람은 계속 변한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다시 하면서도 매번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믿는지도 모른다.
그 믿음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계속해서 다음 스텝을 밟는 일이기 때문이다. 절망했다고 해서 음악이 멈추는 것은 아니고, 상처받았다고 해서 몸이 더는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시 누군가를 믿고, 다시 기대하고, 다시 실패하고, 또다시 조금 다른 리듬으로 같은 자리를 돈다. 어쩌면 인간은 탈출하는 존재라기보다 반복 속에서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사탄탱고>는 그 사실을 위로하지 않는다. “그래도 결국 나아질 것이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떤 삶은 정말로 원을 그릴 뿐이라고, 어떤 절망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며 살아지는 것이라고 보여준다. 나는 오히려 그 점이 좋았다. 모든 상처가 성장으로 이어진다고 말하지 않는 것, 모든 고통이 언젠가 의미가 될 거라고 약속하지 않는 것, 사람이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야만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한 냉정함. 가끔은 그게 값싼 희망보다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
책을 덮고 나는 내가 지나온 몇몇 장면을 떠올렸다. 다시는 기대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다시 기대했던 순간들,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예전과 똑같이 흔들렸던 순간들, 분명 멀리 떠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마음만은 오래전의 어느 자리로 되돌아가 있던 순간들. 그때마다 나는 내가 후퇴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싶어졌다. 뒤로 물러나는 스텝도 춤의 일부일 수 있고,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반드시 실패를 뜻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사람은 완벽한 직선을 그리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흔들리고 되돌아가고 다시 손을 내미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내게 희망은 화살표보다는 춤에 가깝다. 희망은 반드시 나를 더 먼 곳으로 데려가는 힘이 아니다. 같은 자리로 돌아온 뒤에도 다시 몸을 일으켜 다음 박자를 기다리는 힘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자유 역시 원 밖으로 도망치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자유는 내가 지금 춤추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에 생긴다. 누구의 손을 잡고 있는지, 어떤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있는지, 내가 정말 앞으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같은 자리를 돌고 있는지 문득 바라보는 순간.
그렇다고 음악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원도 여전히 닫혀 있다. 다만 그때부터 나는 아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다. 어쩌면 자유란 원을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그 원 안에서 어떤 스텝을 밟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능력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면, 그 안에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반복할지를 선택하는 일만은 아주 조금 남아 있을 테니까.
어쩌면 <사탄탱고>가 끝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미세한 차이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탄과 춤추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고, 어느 순간 그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알아차림 하나가 춤을 멈추지는 못하더라도, 다음 스텝의 방향을 아주 조금 바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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