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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의 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빛소굴 펴냄

이 책에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중편소설 두 편, 「과거로의 여행」「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이 실려있다. 두 작품 모두 기억을 헤매며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는 인물이 등장한다.

*

서로의 사랑을 막 확인한 연인을 모종의 이유로 떨어뜨려 놓아보자. 저 먼 타국으로 떠난 이는 고국에 있는 이를 그리워하며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달달 외며 산다. 이태가 흐르면 만날 수 있나? 그럴 리가. 전쟁이 발발한다. 공백의 시간으론 아홉 해가 좋겠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둘의 마음은 오죽할까. 마침내 다시 만났을 때 이들은,

"그만해요, 루트비히······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우리 그 일은 그만 이야기하기로 해요. 그때의 그 시간이 지금 어디 있나요?"
"시간은 아직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는 확고하게 단언했다. "시간은 우리의 의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입술을 깨물며 9년을 기다렸어요. 하나도 잊은 것이 없습니다." (55-56쪽)

OMG. 이 관계, 반드시 필멸하지 않을까? 시간은 당신의 의지 속에 있지 않으니까! 시간은 흘러가고 오늘은 어제가 될 뿐이다. 거기 어떠한 주관도 개입할 수 없다. 그들이 떨어져 있어야 했던 동안의 시간만이 진실일 뿐이다.

지금, 다시 만난 그들은 다만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여자와 기차에 올라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다만 지난 세월을 추억하는 남자. 숱하게 연습하고 그려봤었던 미래가 현재가 되었는데 모든 것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시구가 여자의 음성으로 재생된다.

얼어붙고 눈 내린 옛 공원에서 / 두 그림자가 과거의 흔적을 찾고 있구나

*

우리네 삶의 밀도는 일정하지 않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시간도 있고, 쏜살같이 가버리는 시간도 있다. 당신의 삶이 완전히 뒤바뀌려면 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카지노에 앉아 있는 한 여자에게 스물네 시간을 줘 보자.

온몸으로 생기를 내뿜으며 게임을 하는 젊은 청년을 보며 매혹된 여자. 그러나 뒤이어 남자는 모든 걸 잃고 곧 죽을 것처럼 카지노를 나선다. 그를 죽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여자는 뒤따라가고, (중략), 그가 결국 죽지 않은 채 동이 튼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사랑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별안간 깨달아버린 여자는, 한 사람을 구원했다는 사실만 아프게 기억하기로. 물론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카지노에서 청년을 다시 발견하게 되니까. 누구인지도 모른 채로 게임에 중독된 그를 발견하고 여자는 뛰쳐나온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하는 동안 그는 이 이야기를 내내 품고 있다가, 몇 번이고 돌려 보다가, 마침내 내뱉는다. 숨 쉴 틈도 없이 차곡차곡 밀려 나오는 이야기. 단지 발화했을 뿐인데 모든 걸 완수한 것만 같은.

*

둘 중 어떤 방식의 '과거로의 여행'이 더 괴롭고 슬픈 일일지. 그러나 이 지난한 여행이 그들만의 것은 아니라는 게 제일 아프다. 우리 역시 때로 그림자처럼 지나간 시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니까. 그래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 길 위를 서성일 때 우리의 표정, 생각, 몸짓을 정말 세세하게 복원한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가 조금도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게 한다. 흥미로운 여행이었다.

(이 책은 '페이지터너스'라는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출판사의 소개에 따르면 "당신을 단숨에 마지막 페이지로 이끌 소설"이다. 실로 그렇다.)

*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2022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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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보러 다대포 가는 1호선 안에서 박솔뫼의 「여름의 끝으로」를 읽다가 이런 부분이,

“차미를 안고 등에 코를 묻으면 땅콩 냄새 같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일정한 소리로 코를 골며 자는 차미의 등에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잠이 올 것 같은 냄새였다.” (33쪽)

어젠 요가원에 좀 빨리 갔고, 한참 동안 나와 선생님 그리고 고양이 샨티밖에 없었는데, 샨티는 내 요가 매트 위에 올라와, 내게 등을 돌린 채로 앉아 있고, 바즈라아사나로 요가를 준비하려던 나는, 금세 샨티의 집사가 되어, 샨티의 등을 주물주물,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어느덧 서늘해진 바람과 따듯한 샨티의 등을 동시에 만졌다. 여름의 끝이구나.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박솔뫼 지음
스위밍꿀 펴냄

2023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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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부산 가는데 『미래 산책 연습』 진짜 안 챙기려 했거든? 방금 후루룩 훑었는데 도무지 안 들고 갈 수가 없네··· 이를테면 이런 장면,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비빔밥을 시킬걸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 하루가 지났고 남은 휴일은 무얼 하지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하려 했지만 때마침 테이블에 커다란 보리차 주전자가 탕 소리를 내며 놓였고 커다랗고 따뜻한 주전자를 보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고 보리차를 마시자 반찬이 나오고 상추가 나오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틈도 없이 테이블 위에 빠짐없이 차려진 밥을 먹기 시작했다." (47쪽)

나도 정말 제발 진실로 진정 이렇게 여행하고 싶다···
2023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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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문학평론가가 주고받은 열두 편의 서신을 모아 놓은 책. ‘지금-여기’의 책들에 관해 나누는 이야기라 무척 재미있다. 두 분이 함께 읽은 책 중에는 내가 살펴보았거나 읽었던 책이 왕왕 있었고. 김대성, 김봉곤, 김지연, 김혜진, 서이제, 알렉세이 유르착, 유성원, 임솔아, 임현, 장류진, 조지 오웰, 한병철의 작품. 3분의 1 이상은 알고 있어서 어찌나 다행이었는지. 그러나 내가 모르는 작품에 관해 나누는 서간을 읽을 때도 역시 즐거웠다. 온종일 한국문학 이야기 정말로 자신 있는 나로서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 가지고 양껏 수다 떠는 걸 지켜보는 게 못내 좋았다. 문학이 수다를 떨게 만드는 순간은 정말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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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에 대한 기만적인 인정으로 무언가를 봉합해버리려는 편의적인 행태에 대해, 저 역시 선생님과 똑같이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계기를 촉발하지 않는 타자는, 아무리 ' 차이'라는 명분으로 세련되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동일성의 반복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선생님과의 대화 혹은 열띤 논쟁이 즐거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합의와 존중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7쪽)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역시나 서로의 생각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꼈을 때. 올해도 앞으로도 마음껏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장정일 외 1명 지음
안온북스 펴냄

2023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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