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로우
•이유와 주인들
우리는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들을 견디지 못한다. 어떤 일을 하는 데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데도 이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유의 거처를 알지 못한다. 어떤 일의 기원은 늘 자신의 육체를 현재의 결과 속에 꽁꽁 숨겨놓는다. 들키지 않는다. 이유와의 숨바꼭 질에서 우리는 영원한 술래일 뿐이다.
그 때문일까. 나는 간혹 내가 아닌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나 를 거쳐간 일들이 뻔한 소설이나 지루한 드라마의 줄거리처럼 요약 된 채 기억되었다. 하루하루 어딘가 낯익은 누군가가 내 앞에 나타 나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친숙하게 해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인식하는 것조차 무의미하거나 무력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젊음의 무의미
왜 인간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일까. 입에 넣은 사탕이 다 녹기도 전에 둘로 쪼개져 불안했던 적이 있다. 그날은 누군가와 결별할 것 같았고 위태롭던 사랑이 끝날 것 같았다. 쪼개진 사탕을 억지로 붙여놓으려고 했을 때 느꼈던 한 손의 반죽 같던 혀의 우둔함. 나는 그날의 불행을 모두 사탕 탓으로 돌렸다. 그때 사탕은 사탕을 넘어서 일순간 전능해졌던 것이다.
다만 정말 우리에게 기념해야 할 날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어떨 까. 시작도 끝도 없는 연속만을 보여주는 죽은 시간들을 우리가 견 더낼 수 있을까. 좀 번거롭더라도 우리에게는 되새길 만한 의미가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냥 흘러가버리는 세월에 동그라미를 쳐 놓는 것으로라도 말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상실의 연속이라 할지 라도 시간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닐 테니까.
•주어와 주인공
우리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세상을 살지 않는다. 다중인격을 이야 기하는 게 아니다. 나를 지칭하는 수많은 대명사를 보면 안다. 누구 에겐 아들'이고 누구에겐 '삼촌이다. '선생님'이라고 불릴 때는 선생 님의 마인드를 가져야 하며, 어떤 태도나 행동 때문에 '진상'으로 불 리기도 한다. 어떻게 불리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간 혹 습관적으로 부르는 말이 그대로 폭력이 되기도 한다. 설령 의도 하지 않았더라도 특정 성향이나 차이를 부각시키는 호칭은 개개인 의 인격을 지우고 상대를 결정된 조건 속에 가둬버리기 때문이다.
호칭 속에는 서로의 관계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인식의 지평이다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말이 운명을 감당한다고 말하는 것 이겠지.
•진열된 밤
어둠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열어놓는다.모든 사물을 지워버림으로써 모든 공간을 투명하게 만든다. 어둠 말고 무엇이 이렇게 완벽하게 이 세계를 지우고 또 채울 수 있겠는 가. 다만 건너편 불빛들, 간판들, 가로등과 이따금 지나가는 비행기 불빛이 어둠에 여백을 만든다. 여전히 그 여백은 문자 밖이다. 해독 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해독되지 않지만 장악하는 것들. 우리는 무 엇에 장악당한지도 모른 채 그것들에 기꺼이 스스로를 내주고 만 다. 아니, 자신만 빼고 세상을 전부 다른 시간 속으로 옮겨놓는다.
우리는 덩그러니 그 시간의 바깥에 남아 닿을 수 없는 시간을 지키는 것이다.
0
챙님의 인생책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