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 제목을 처음 봤을 땐 그냥 취향을 묻는 가벼운 질문인 줄 알았다. 근데 다 읽고 나니 이 질문이 훨씬 무겁게 다가왔다. 나는 이 지점에서 누군가에게 무엇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는 행위가 사실 얼마나 드문 애정의 표현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취향을 묻는다는 건 단순히 좋고 싫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무엇 앞에서 마음이 움직이는지, 그 사람 안에 어떤 세계가 들어 있는지를 궁금해한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그 사람의 일상을 챙기고 그 사람 곁에 머무는 걸로 확인하는데, 취향을 묻는 건 그보다 훨씬 안쪽을 향한 관심이다. 하루를 함께 보내는 건 그 사람의 삶에 참여하는 일이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묻는 건 그 사람이 혼자 있을 때조차 무엇으로 채워지는 사람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일이니까.
폴은 서른아홉 살의 실내장식가로, 로제와 오랫동안 안정적이지만 뜨겁지는 않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로제는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여자들과의 외도를 당연하게 여기고, 폴 역시 그런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나는 여기서 이해라는 단어가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체념을 감추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이해한다는 걸 성숙한 사랑의 증거처럼 여기지만, 폴의 이해는 사랑이 성숙해서 나온 게 아니라 사랑이 이미 식어버린 자리를 조용히 견디는 방식에 더 가까웠다. 이해라는 말이 때로는 포기의 가장 우아한 이름일 수도 있다는 것. 진짜 사랑이라면 오히려 이해하지 못해서 다투고, 서운해하고, 그 감정을 계속 표현하며 부딪혀야 하는데, 폴에게는 그 부딪힘조차 사라진 지 오래였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게 상대의 어떤 부분도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한다는 뜻이 되어버렸을 때, 그 이해는 관계를 지켜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관계가 이미 멈춰버렸다는 걸 가장 정중하게 알려주는 신호였다.
그런 그녀에게 스물다섯 살의 시몽이 다가온다. 시몽은 로제처럼 그녀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그녀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즐겨 듣는지까지 하나하나 궁금해한다.
나는 이 두 남자를 나란히 놓고 보면서, 사랑받는다는 것과 익숙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쉽게 자리를 뒤바꾸는지를 생각했다. 로제는 여전히 폴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물을 필요가 없다고, 이미 다 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근데 그 확신이야말로 관계를 가장 조용히 죽이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오래 곁에 둘수록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해 덜 궁금해하게 되는데, 그건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한 시선이 멈춰버렸기 때문일 때가 더 많다. 그러니 그 순간이 어쩌면 사랑이 관계로, 관계가 습관으로 넘어가는 지점이었다.
시몽이 특별했던 이유는 그가 더 잘생기거나 더 다정해서가 아니라, 폴을 아직 다 알지 못하는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그 시선 안에서 폴은 로제와의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지냈던, 여전히 궁금해할 만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다시 사랑받고 싶어지는 순간은 대개 그 사람이 나를 아직 다 모른다고 느낄 때라는 걸 깨달았다. 완전히 이해받는다는 것과 완전히 발견된다는 것은 얼핏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전자는 안정을 주지만, 후자는 살아있다는 감각을 준다.
폴은 결국 시몽에게 잠시 흔들리지만, 소설의 끝에서 다시 로제에게로 돌아간다. 처음 이 결말을 마주했을 땐 솔직히 아쉬웠다. 시몽이 그녀의 세계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궁금해했는데, 그녀는 결국 더는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 곁으로 돌아간다. 근데 다시 곱씹어보니, 이 결말이야말로 사랑에 대해 훨씬 솔직한 결말이었다. 폴이 로제에게 돌아간 건 그를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미 함께 쌓아온 시간의 무게와 그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을 완전히 놓아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어떤 관계를 지속하는 이유가 늘 사랑의 크기와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걸 생각하게 됐다. 때로 우리는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관계를 버리고 난 뒤에 감당해야 할 낯섦이 두려워서 익숙한 자리에 남는다. 시몽이 준 그 생생한 관심은 분명 폴을 다시 살아있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 관심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미래이기도 했다. 로제와의 삶은 뜨겁지 않아도 예측 가능했고, 그 예측 가능함이 주는 안전함은 생각보다 훨씬 힘이 셌다.
나는 이 대목에서, 사람이 결국 선택하는 건 더 큰 설렘이 아니라 더 견딜 만한 불확실성일 때가 많다는 걸 새삼 느꼈다. 시몽을 택했다면 폴은 다시 궁금해하는 사람 곁에서 살 수 있었겠지만, 동시에 언젠가 그 관심마저 시들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과도 함께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로제에게 돌아간 건 패배가 아니라, 이미 겪어본 상실과 아직 겪어보지 못한 상실 중에서 그나마 익숙한 쪽을 선택한 것에 가까웠다.
시몽이 폴에게 브람스를 좋아하냐고 물었던 그 질문이 소설 끝까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이 소설의 제목이 물음표가 아니라 말줄임표로 끝난다는 걸 알고 나니 더 그랬다. 물음표였다면 시몽이 던진 질문 자체였겠지만, 말줄임표는 그 질문 앞에서 선뜻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폴의 목소리였다. 그 질문은 결국 음악 취향에 대한 게 아니라, 그녀 자신이 한때 브람스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조차 잊을 만큼 로제라는 한 사람에게 자신을 통째로 내어주고 살아왔다는 걸 그녀 스스로에게 되비추는 질문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덮으면서, 우리가 관계 속에서 서서히 잃어가는 게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어쩌면 스스로에게 무엇을 좋아하냐고 묻는 그 습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관계일수록 상대의 취향보다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에 더 익숙해지고,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게 뭔지조차 잊어버린다. 폴이 로제에게 돌아간 게 잘못된 선택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시몽을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이 브람스를 좋아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결국 로제에게 돌아갔다 해도, 한 번 그 질문에 부딪혀본 사람과 한 번도 부딪혀본 적 없는 사람은 같은 익숙함 속에 있어도 전혀 다른 무게로 그 자리를 견딘다. 그 질문이 그녀에게 남긴 건 답이 아니라, 자신이 언젠가 무언가를 스스로 좋아했던 사람이었다는 흐릿한 기억이었다.
시몽이냐 로제냐,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 그 선택을 묻는 것처럼 보인다. 근데 다 읽고 나면 정작 중요한 건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내가 여전히 나로 남아 있는지, 나만의 취향과 세계를 잃지 않고 있는지였다는 걸 알게 된다. 폴의 비극은 어느 쪽을 선택했느냐가 아니라, 오랫동안 그 질문 자체를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고 살아왔다는 데 있었다.
누군가를 오래 사랑할수록, 사람은 그 사랑 밖의 자신을 궁금해하는 일에 점점 게을러지는 것 같다. 매일 같은 식탁에서 같은 사람과 밥을 먹고, 같은 계절에 같은 여행지를 떠올리다 보면, 어느새 내 취향이 그 사람의 취향과 구분이 안 될 만큼 겹쳐진다. 그게 편해서 좋다가도, 문득 그 겹침이 나를 지워가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지금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일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민음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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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설국을 여는 이 첫 문장은 이방인 다음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첫 문장이다. 나는 사실 겨울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부모님은 겨울을 제일 좋아하시고 그래서인지 이 소설도 유독 아끼신다. 아마도 이 첫 문장이 주는 그 낭만 때문이 아닐까 싶다.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세상이 완전히 다른 색으로 바뀌어버리는 장면, 그리고 밤인데도 오히려 더 환해지는 그 역설. 겨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두 문장만으로도 이미 이 소설에 마음을 뺏길 것 같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도쿄에서 온 유부남으로, 온천 마을의 게이샤 고마코를 만나러 몇 번이고 이 눈의 고장으로 온다. 그는 처음부터 이곳을 徒労, 그러니까 헛수고의 공간으로 여긴다. 고마코가 그에게 쏟는 진심을 그는 그저 아름답지만 부질없는 것으로 바라본다. 나는 이 관계의 비대칭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한 사람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랑을 그저 감상하는 자리에 서 있다.
이 비대칭에서 흥미로웠던 건, 우리가 흔히 사랑을 덜 주는 쪽이 관계의 주도권을 쥔다고 여긴다는 점이었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상처받을 위험도 적으니 더 유리한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마무라도 그랬다. 그는 필요할 때면 언제든 도쿄로, 자신의 안전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반면 고마코는 이 눈의 고장에 발이 묶인 채, 그가 오는 계절만을 기다리며 자신의 시간 전체를 걸고 있었다.
근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구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마음을 다 준 사람은 그 순간 자체로 이미 완결된 무언가를 얻는다. 고마코는 자신이 무엇을 향해 그렇게 애타게 마음을 쏟았는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알고 있었고, 그 확신은 설령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결코 그녀에게서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반면 거리를 둔 사람은 그 무엇도 진짜로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감상자로만 남는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의 삶을 그토록 섬세하게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알아보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덜 사랑해서 안전해 보였던 그 자리가, 실은 그를 점점 더 텅 비게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온 마음을 준 사람은 상처를 입을지언정 그 상처의 흔적으로라도 자신이 무언가를 진짜로 살아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지만, 끝까지 거리를 지킨 사람에게는 그런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나는 이 지점에서, 관계에서 덜 사랑하는 쪽이 정말로 더 많이 가진 쪽인지 다시 묻게 됐다.
고마코라는 인물 자체도 계속 마음에 남았다. 그녀는 몰락해가는 마을에서 게이샤로 일하며 시마무라에게 마음을 쏟는데, 그 사랑이 결코 보답받지 못하리라는 걸 그녀 자신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근데 그녀는 그 헛수고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이 지점에서 헛수고라는 말이 가진 편견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보통 어떤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하면 그걸 헛수고라 부르며 그 시간의 가치를 통째로 지워버린다. 결과가 없으면 과정도 의미 없었던 걸로 소급해서 처리해버리는 것이다. 근데 고마코의 사랑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녀는 이 마음이 결실을 맺지 못하리란 걸 이미 알면서도 계속했고, 바로 그렇게 알면서도 계속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사랑을 더 순수하게 만들었다. 결실을 기대하는 사랑에는 언제나 그 결실을 향한 은밀한 계산이 섞여 있는데, 고마코의 사랑에는 애초에 그 계산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헛수고는 실패한 사랑이 아니라, 애초에 성공이나 실패라는 잣대 자체가 적용될 수 없는 종류의 마음이었다.
또 하나 오래 남았던 건 요코라는 인물이었다. 시마무라는 기차 안에서 유리창에 비친 요코의 얼굴을 보고, 그 얼굴이 저녁 풍경과 겹쳐지는 걸 지켜본다. 실체와 반사, 사람의 얼굴과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유리창 하나 위에서 하나로 겹쳐지는 그 장면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누군가를 본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우리는 보통 누군가를 본다는 걸 그 사람 자체를 온전히 인식하는 행위라고 여기는데, 이 장면은 본다는 행위에 언제나 배경이, 그러니까 보는 사람이 서 있는 자리와 그 순간의 풍경이 함께 뒤섞여 들어간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가 누군가를 본다고 믿는 순간에도, 사실 우리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가 겹쳐진 어떤 이미지를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순수하게 그 사람만을 담아내는 시선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한다고 말할 때, 그 기억 속에서 우리가 정말 붙잡고 있는 건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있던 그 순간의 공기, 빛, 계절 같은 것들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생각을 하면서, 내가 오래 붙잡고 있는 어떤 얼굴들도 사실은 그 얼굴 자체가 아니라 그 얼굴이 겹쳐져 있던 어떤 저녁, 어떤 창밖 풍경과 함께 기억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시마무라가 요코의 얼굴에서 끝내 눈을 떼지 못했던 건 그녀라는 사람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그 풍경과 겹쳐지는 그 찰나의 이미지가 도저히 다시 만날 수 없는 유일한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잊지 못하는 이유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다.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있던 그 다시 오지 않을 배경을 잊지 못하는 것. 그러니 그리움이란 결국 사람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을 향한 감정, 사람의 얼굴을 빌려 우리가 붙잡으려 하는 시간에 대한 집착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덮으면서 나는 헛수고와 아름다움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오래 하게 됐다.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에 자꾸 결실을 요구하고, 결실이 없으면 그 시간을 낭비였다고 판정해버린다. 근데 설국이 보여주는 세계에서는, 결실 없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게 타오르는 마음이었고, 뛰어들지 않은 시선이야말로 가장 정밀하게 상대를 담아내는 시선이었다. 겨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소설에 그토록 마음을 주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겨울이라는 계절 자체가 원래 그런 계절이니까.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눈 밑에서는 무언가가 조용히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을 덮으면서 나는 헛수고와 아름다움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오래 하게 됐다.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에 자꾸 결실을 요구하고, 결실이 없으면 그 시간을 낭비였다고 판정해버린다. 근데 설국이 보여주는 세계에서는, 결실 없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게 타오르는 마음이었고, 뛰어들지 않은 시선이야말로 가장 정밀하게 상대를 담아내는 시선이었다.
고마코의 사랑도, 시마무라의 시선도, 요코의 얼굴에 겹쳐진 그 풍경도, 결국 다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확실히 손에 쥐지 못한 채로도 무언가를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는 것. 우리는 흔히 사랑이든 노력이든 결실을 맺어야 비로소 그 시간이 정당화된다고 믿지만, 이 소설 속 인물들은 그 정당화를 애초에 필요로 하지 않았다. 고마코는 보답을 기다리지 않았고, 시마무라는 소유하지 않고도 가장 깊이 보았고, 요코는 붙잡히지 않은 채로 가장 오래 기억됐다.
겨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소설에 그토록 마음을 주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겨울이라는 계절 자체가 원래 그렇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눈 밑에서는 늘 무언가가 조용히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결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그 밑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라고 믿는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고,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헛된 게 아니라는 것. 지금 내가 붙잡지 못한 채 흘려보내는 마음들도, 어쩌면 눈 밑의 겨울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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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에 향수를 정말 좋아하는데, 대학교 때 좋아했던 친구도 향수를 진짜 좋아해서 매일같이 시향하고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도 제목에 끌려서 집어 들었다. 다 읽고 나니, 향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인간의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이야기로 쓰일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그르누이는 18세기 파리, 그중에서도 가장 악취가 진동하던 생선 좌판 밑에서 태어난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그를 거쳐 간 사람들마다 이상하게도 그에게서 원초적인 혐오감을 느낀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르누이에게는 자신의 체취가 없었다. 나는 이 설정에서 이미 소름이 돋았다. 세상 모든 사람과 사물에게서 냄새를 읽어낼 수 있는,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예민한 후각을 가진 인간이, 정작 자기 자신은 아무 냄새도 갖지 못했다는 것. 그는 세상을 완벽하게 감각할 수 있으면서도, 세상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없는 존재였다.
이 지점에서 나는 존재한다는 것과 감지된다는 것 사이의 간극을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보통 존재를 당연하게 여긴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것이라고. 근데 그르누이에게는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확실하게 존재했지만, 아무도 그의 존재를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냄새가 없다는 건 단순한 신체적 특이사항이 아니라, 세상이 그를 감지할 통로 자체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그가 다른 사람들의 체취를 그토록 갈망하고, 결국 그것을 훔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하는 건 단순한 광기라기보다, 존재를 증명받고 싶다는 지극히 근원적인 결핍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평소에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길 바라는 그 흔한 마음도 결국 이 결핍의 아주 옅은 버전이 아닐까 싶었다. 그르누이는 그걸 그저 극단까지 밀어붙였을 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그르누이의 결핍이 무서웠던 진짜 이유는 그가 그저 타인의 냄새를 원했다는 데 있지 않았다. 그는 남의 존재감을 훔쳐서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존재감 자체를 타인에게서 강탈하려는 마음은 얼핏 같은 결핍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관계를 향하고, 후자는 관계를 파괴하면서 그 파괴의 잔해로 자신을 채운다. 나는 이 차이를 보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체는 결코 잘못이 아니지만 그 결핍을 채우는 방식이 언제나 타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위태로운 균형인지를 다시 생각했다. 그르누이는 그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자리에서 태어난, 결핍이 극한까지 순수해진 형태였다.
그가 스물다섯 명의 소녀를 죽여 만들어낸 궁극의 향수는, 인간이 인간에게 느낄 수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냄새 하나로 완벽하게 흉내 낸 것이었다. 사형장에 선 그르누이가 그 향수를 뿌리는 순간, 그를 죽이려던 군중 전체가 그가 죄를 지었을 리 없다는 확신에 빠져 미쳐버린다. 나는 이 장면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근거 없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다시 생각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이유가 그 사람의 인격이나 행동에서 온다고 믿는다. 근데 이 소설은 그 사랑이 사실 아주 정교하게 조합된 화학적 신호 하나로도 완전히 조작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확신하는 사랑의 근거들도, 사실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훨씬 원초적인 감각의 층위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건 아닐까. 이성이 뒤늦게 이유를 찾아 나서기 전에, 몸은 이미 냄새와 체온과 목소리의 떨림 같은 것들로 먼저 판단을 끝내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그르누이는 그 향수를 뿌린 채 파리의 뒷골목으로 걸어 들어가 사람들에게 산 채로 뜯어 먹힌다. 나는 이 결말에서 사랑받는다는 것의 가장 잔인한 얼굴을 마주했다. 그가 평생 갈망했던 건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누군가 확인해주는 일이었다. 근데 그 갈망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를 통째로 삼켜버린다. 사랑받는다는 것과 삼켜진다는 것이 이렇게 종이 한 장 차이로 붙어 있다는 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에게 완전히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소망은, 그 끝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결과와 맞닿아 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이 결말을 곱씹으면서, 완전한 사랑이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다시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상대가 나를 남김없이 원해주기를, 나의 모든 것에 압도되기를 바란다. 근데 그 바람이 정말로 이루어지는 순간을 상상해보면, 그건 상대가 나를 온전히 소유하게 되는 순간과 정확히 겹친다.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의 끝에는 늘 두 개의 문이 있었다. 하나는 함께 존재하는 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존재가 상대에게 완전히 흡수되어버리는 문. 그르누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 두 번째 문을 향해 평생을 걸어갔던 셈이다.
이 소설을 덮고 나서 나는 향을 대하는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나는 늘 향수를 고를 때 이 향이 나를 어떻게 표현해줄까를 생각했다. 근데 그르누이를 보고 나니, 향이라는 게 단순한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려는 아주 절박한 시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매일 몸에 향을 두르는 행위는 나는 여기 존재한다는 그 가장 기본적인 확인을 매일 아침 스스로에게 해주는 의식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향을 고른다는 건 단순히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정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떤 존재로 매일 아침 다시 세울지를 정하는 일에 가까웠다. 나는 그동안 향을 통해 나를 표현하려 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향을 통해 매일 나를 확인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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