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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설국을 여는 이 첫 문장은 이방인 다음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첫 문장이다. 나는 사실 겨울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부모님은 겨울을 제일 좋아하시고 그래서인지 이 소설도 유독 아끼신다. 아마도 이 첫 문장이 주는 그 낭만 때문이 아닐까 싶다.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세상이 완전히 다른 색으로 바뀌어버리는 장면, 그리고 밤인데도 오히려 더 환해지는 그 역설. 겨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두 문장만으로도 이미 이 소설에 마음을 뺏길 것 같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도쿄에서 온 유부남으로, 온천 마을의 게이샤 고마코를 만나러 몇 번이고 이 눈의 고장으로 온다. 그는 처음부터 이곳을 徒労, 그러니까 헛수고의 공간으로 여긴다. 고마코가 그에게 쏟는 진심을 그는 그저 아름답지만 부질없는 것으로 바라본다. 나는 이 관계의 비대칭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한 사람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랑을 그저 감상하는 자리에 서 있다.
이 비대칭에서 흥미로웠던 건, 우리가 흔히 사랑을 덜 주는 쪽이 관계의 주도권을 쥔다고 여긴다는 점이었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상처받을 위험도 적으니 더 유리한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마무라도 그랬다. 그는 필요할 때면 언제든 도쿄로, 자신의 안전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반면 고마코는 이 눈의 고장에 발이 묶인 채, 그가 오는 계절만을 기다리며 자신의 시간 전체를 걸고 있었다.
근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구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마음을 다 준 사람은 그 순간 자체로 이미 완결된 무언가를 얻는다. 고마코는 자신이 무엇을 향해 그렇게 애타게 마음을 쏟았는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알고 있었고, 그 확신은 설령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결코 그녀에게서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반면 거리를 둔 사람은 그 무엇도 진짜로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감상자로만 남는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의 삶을 그토록 섬세하게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알아보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덜 사랑해서 안전해 보였던 그 자리가, 실은 그를 점점 더 텅 비게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온 마음을 준 사람은 상처를 입을지언정 그 상처의 흔적으로라도 자신이 무언가를 진짜로 살아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지만, 끝까지 거리를 지킨 사람에게는 그런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나는 이 지점에서, 관계에서 덜 사랑하는 쪽이 정말로 더 많이 가진 쪽인지 다시 묻게 됐다.
고마코라는 인물 자체도 계속 마음에 남았다. 그녀는 몰락해가는 마을에서 게이샤로 일하며 시마무라에게 마음을 쏟는데, 그 사랑이 결코 보답받지 못하리라는 걸 그녀 자신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근데 그녀는 그 헛수고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이 지점에서 헛수고라는 말이 가진 편견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보통 어떤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하면 그걸 헛수고라 부르며 그 시간의 가치를 통째로 지워버린다. 결과가 없으면 과정도 의미 없었던 걸로 소급해서 처리해버리는 것이다. 근데 고마코의 사랑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녀는 이 마음이 결실을 맺지 못하리란 걸 이미 알면서도 계속했고, 바로 그렇게 알면서도 계속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사랑을 더 순수하게 만들었다. 결실을 기대하는 사랑에는 언제나 그 결실을 향한 은밀한 계산이 섞여 있는데, 고마코의 사랑에는 애초에 그 계산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헛수고는 실패한 사랑이 아니라, 애초에 성공이나 실패라는 잣대 자체가 적용될 수 없는 종류의 마음이었다.
또 하나 오래 남았던 건 요코라는 인물이었다. 시마무라는 기차 안에서 유리창에 비친 요코의 얼굴을 보고, 그 얼굴이 저녁 풍경과 겹쳐지는 걸 지켜본다. 실체와 반사, 사람의 얼굴과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유리창 하나 위에서 하나로 겹쳐지는 그 장면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누군가를 본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우리는 보통 누군가를 본다는 걸 그 사람 자체를 온전히 인식하는 행위라고 여기는데, 이 장면은 본다는 행위에 언제나 배경이, 그러니까 보는 사람이 서 있는 자리와 그 순간의 풍경이 함께 뒤섞여 들어간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가 누군가를 본다고 믿는 순간에도, 사실 우리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가 겹쳐진 어떤 이미지를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순수하게 그 사람만을 담아내는 시선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한다고 말할 때, 그 기억 속에서 우리가 정말 붙잡고 있는 건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있던 그 순간의 공기, 빛, 계절 같은 것들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생각을 하면서, 내가 오래 붙잡고 있는 어떤 얼굴들도 사실은 그 얼굴 자체가 아니라 그 얼굴이 겹쳐져 있던 어떤 저녁, 어떤 창밖 풍경과 함께 기억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시마무라가 요코의 얼굴에서 끝내 눈을 떼지 못했던 건 그녀라는 사람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그 풍경과 겹쳐지는 그 찰나의 이미지가 도저히 다시 만날 수 없는 유일한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잊지 못하는 이유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다.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있던 그 다시 오지 않을 배경을 잊지 못하는 것. 그러니 그리움이란 결국 사람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을 향한 감정, 사람의 얼굴을 빌려 우리가 붙잡으려 하는 시간에 대한 집착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덮으면서 나는 헛수고와 아름다움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오래 하게 됐다.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에 자꾸 결실을 요구하고, 결실이 없으면 그 시간을 낭비였다고 판정해버린다. 근데 설국이 보여주는 세계에서는, 결실 없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게 타오르는 마음이었고, 뛰어들지 않은 시선이야말로 가장 정밀하게 상대를 담아내는 시선이었다. 겨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소설에 그토록 마음을 주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겨울이라는 계절 자체가 원래 그런 계절이니까.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눈 밑에서는 무언가가 조용히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을 덮으면서 나는 헛수고와 아름다움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오래 하게 됐다.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에 자꾸 결실을 요구하고, 결실이 없으면 그 시간을 낭비였다고 판정해버린다. 근데 설국이 보여주는 세계에서는, 결실 없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게 타오르는 마음이었고, 뛰어들지 않은 시선이야말로 가장 정밀하게 상대를 담아내는 시선이었다.
고마코의 사랑도, 시마무라의 시선도, 요코의 얼굴에 겹쳐진 그 풍경도, 결국 다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확실히 손에 쥐지 못한 채로도 무언가를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는 것. 우리는 흔히 사랑이든 노력이든 결실을 맺어야 비로소 그 시간이 정당화된다고 믿지만, 이 소설 속 인물들은 그 정당화를 애초에 필요로 하지 않았다. 고마코는 보답을 기다리지 않았고, 시마무라는 소유하지 않고도 가장 깊이 보았고, 요코는 붙잡히지 않은 채로 가장 오래 기억됐다.
겨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소설에 그토록 마음을 주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겨울이라는 계절 자체가 원래 그렇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눈 밑에서는 늘 무언가가 조용히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결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그 밑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라고 믿는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고,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헛된 게 아니라는 것. 지금 내가 붙잡지 못한 채 흘려보내는 마음들도, 어쩌면 눈 밑의 겨울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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