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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민음사 펴냄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를 여는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처음부터 조금 의심했다. 정말 행복은 서로 닮아 있고 불행만이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오히려 이 문장을 거꾸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 단순해서 비슷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대개 행복 앞에서는 그 내부를 굳이 해부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잘 돌아가는 시계의 톱니를 하나씩 들여다보는 사람은 드물지만, 시계가 멈추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뚜껑을 열고 무엇이 어긋났는지 살핀다. 불행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불행은 삶의 표면에 금을 내고, 그 틈으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욕망과 두려움, 사랑과 권태, 책임과 고독의 결을 드러낸다. 그러니 불행한 가정들이 저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은 불행이라는 것이 특별히 더 복잡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불행 앞에서야 비로소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에서 안나와 레빈의 이야기가 나란히 흐른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안나는 사교계의 한가운데에서 브론스키와의 사랑이라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레빈은 도시에서 멀어진 들판에서 농부들과 낫을 휘두르며 노동과 가족, 신앙 속에서 삶의 의미를 더듬어간다. 한 사람의 삶은 점점 빠르게 타오르다가 소진되고, 다른 사람의 삶은 흙 위에 한 겹씩 천천히 쌓인다. 그러나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면 두 사람은 사실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무엇이 내 삶을 견디게 할 것인가. 안나는 그 대답을 사랑이라는 하나의 강렬한 감정에서 찾았고, 레빈은 노동과 가족과 타인, 그리고 자신보다 오래 존재해온 어떤 질서 속에서 찾으려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차이는 행복과 불행의 차이라기보다 삶의 공백을 채우는 방식의 차이에 가까워 보였다. 안나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는 불꽃을 원했고, 레빈은 어둠 속에서도 오래 꺼지지 않는 작은 등불들을 하나씩 켜나갔다.
안나의 비극이 유독 서늘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브론스키를 사랑할수록 그녀의 세계는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좁아진다. 처음에 사랑은 답답했던 삶의 벽을 무너뜨리고 바깥으로 나아가는 문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문은 오직 브론스키에게로만 이어지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남편과 아들, 사회적 관계와 자신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뒤, 그녀는 점차 사랑 하나에 자기 존재의 거의 모든 무게를 싣는다. 그러자 사랑은 더 이상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감정이 아니라 삶 전체를 지탱해야 하는 기둥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한 사랑이라도 한 인간의 삶 전체를 혼자 떠받칠 수는 없다. 기둥이 하나뿐인 집은 그 기둥에 작은 균열만 생겨도 건물 전체가 흔들린다. 브론스키의 무심한 표정 하나, 늦은 귀가 하나,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작은 의심 하나가 안나에게는 단순한 연인의 갈등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곧 자신의 존재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을 잃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잃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안나의 비극을 사랑을 선택한 사람에게 내려진 벌처럼 읽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비극은 인간이 단 하나의 존재나 감정에게 자기 삶을 증명해달라고 요구할 때 생기는 위험에 가까워 보였다. 사랑은 한 사람의 삶을 밝혀줄 수는 있어도 그 사람 대신 삶 전체가 되어줄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이 너무 강렬할 때 자꾸만 그것을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착각한다. 마치 태양이 너무 밝아서 그 빛 아래 다른 별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감정이 지나치게 커지면 그 밖에 자신을 붙들고 있던 것들이 모두 사라진 듯 느껴진다. 그러나 별들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된 것뿐이다. 안나는 결국 사랑 이외의 빛을 거의 볼 수 없는 곳까지 걸어갔고, 그 하나의 빛마저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자신에게 남은 세계 전체가 어두워졌다고 믿게 된다.
반대로 레빈이 삶의 의미에 가까워지는 순간들은 이상하리만큼 소박하다. 나는 그가 농부들과 함께 밭에서 낫을 휘두르는 장면을 읽으며, 톨스토이가 왜 하필 사유가 아니라 노동 속에서 그에게 잠깐의 평화를 허락했는지를 생각했다. 레빈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만, 죽음을 앞둔 형의 몸 앞에서는 그 모든 질문과 논리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죽음은 사유로 풀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설명이 끝나는 자리처럼 그 앞에 놓인다. 그런데 들판에서 몸을 움직일 때, 땀이 흐르고 낫이 일정한 간격으로 풀을 베어낼 때, 그는 잠시 질문하는 자신을 잊는다. 그 순간 삶은 설명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살아지고 있는 하나의 리듬이 된다. 나는 여기서 의미라는 것이 우리가 끝끝내 발견해야 할 문장이라기보다, 때로는 질문을 잊을 만큼 무언가에 온전히 몸을 맡기는 순간에 잠깐 나타나는 감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어느 순간 의미가 뒤늦게 우리를 따라잡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나가 마지막으로 기차역을 향해 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 거리의 풍경을 하나같이 추하고 악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장면도 오래 남았다. 그 순간 그녀에게 세상은 갑자기 견딜 수 없이 천박하고 비열한 장소가 된다. 그러나 변한 것이 정말 세상이었을까.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며 절망이라는 감정에는 자기 자신을 세계 전체로 확대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슬픈 사람에게 세상은 슬퍼 보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모든 우연은 위협의 징조로 읽힌다. 마음은 투명한 유리창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색으로 바깥을 물들이는 스테인드글라스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안나의 마지막 세계가 그토록 어두웠던 것은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녀 안에서 이미 너무 많은 빛이 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불행과 세계의 본질을 더 이상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느새 세상에는 절망밖에 없다는 명제로 바뀌는 순간 말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소설의 첫 문장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행복한 가정이 모두 비슷해 보이는 까닭은 어쩌면 행복이 어떤 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것들이 서로의 무게를 조금씩 나누어 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족과 일, 사랑과 우정, 습관과 책임, 신념과 사소한 기쁨들이 서로 기대어 있기 때문에 하나가 흔들려도 삶 전체가 곧바로 쓰러지지 않는 것이다. 행복은 하나의 거대한 기둥 위에 세워진 궁전이 아니라, 얼핏 보기에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수많은 들보와 못이 서로의 무게를 조금씩 나눠 가진 집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안나 카레니나>를 덮고 나서 나는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보다 무엇들이 나를 붙들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됐다. 나는 지금 내 삶의 무게를 어디에 싣고 있는지, 혹시 하나의 사랑이나 하나의 성공, 한 사람의 인정 같은 것에 너무 많은 무게를 몰아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됐다. 안나와 레빈의 삶은 결국 나에게 서로 다른 대답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경고처럼 남았다. 하나는 삶 전체를 단 하나의 불꽃에 맡겼을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그 불길 속에서 자기 모습을 잃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삶이란 거대한 의미 하나를 찾아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작고 평범한 것들에게 조금씩 자신의 무게를 나눠주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삶은 어쩌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견딜 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무너질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유를 만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흔들릴 때는 일이, 일이 무너질 때는 사람이, 믿음이 희미해질 때는 아주 사소한 하루의 습관이 우리를 붙잡아주는 것. 그렇게 서로 다른 작은 기둥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서로의 균열을 대신 견디고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의 상실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어쩌면 톨스토이가 그토록 많은 인물과 관계와 일상을 이 거대한 소설 안에 밀어 넣은 이유도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한 인간의 삶은 결코 하나의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수많은 불완전한 의미들 사이에 조금씩 자신의 무게를 나누어 싣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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