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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숲

천선란 지음
자이언트북스 펴냄

"태어나보니 이곳이었다. 마르코가 삶 전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선택권이 결여된 순간이 그때일 것이다. 탄생. 그것만큼은 마르코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이끼숲에 대한 사전적 배경 없이 글을 잃었다. 이것도 포스트아포칼립스물에 가깝나. 지하세계에서 삶을 꾸리며 살아가는 지구인들의 이야기로, ‘바다눈’, ‘우주늪’, ‘이끼숲’ 세 가지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을 따로 읽기도 하지만, 나는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읽었다. 연작이기도 하고...

메인 제목답게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끼숲’ 이야기도 인상 깊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큰 울림을 준 것은 ‘우주늪’이었다.

우주늪은 태어났지만 존재하지 않는 아이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존재하지 않는 채로 살아가던 아이는, 어느 순간 스스로를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인식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 이상 혼자 기어다니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때 터뜨린 울음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그 울음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나는 여기 있다’는 선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편 ‘바다눈’에서는 “어떤 순간은 마르코를 살고 싶게 했고, 어떤 순간은 마르코를 죽고 싶게 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이 마음에 남았던 이유는, 사람이 결국 행복과 불행을 모두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늘 그 갈림길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이 문장을 읽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왜 행복과 불행을 모두 느끼도록 되어 있을까. 행복하기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걸까, 불행 없이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불행 속에서 작은 희망을 사랑하는 존재다. 어쩌면 그 작은 희망만이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끼숲’은 그런 희망에 대한 이야기다.

이끼숲을 읽으며 떠오른 작품은 1984였다. 감시와 통제 속에서 유지되는 폐쇄된 세계라는 점에서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세계 속에서도 인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간다. 유오의 말처럼, 살아 있는 모든 작은 것들은 강하다. 그리고 그 말대로, 아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간다.

유별난 슬픔을 간직한 소마가 다시 집 밖으로 나오게 된 것도 유오의 영향이었다. 소마는 유오가 간직했던 꿈을 이어가기 위해, 설령 그것이 허울뿐인 약속일지라도 지키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결국 체제에 저항하고,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마침내 소마는 유오와 함께 지상의 숲을 보게 된다.

읽는 내내 지하 세계가 붕괴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국 세계는 무너지지 않는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그곳은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 유지된다.

그러나 개인의 삶으로 시선을 옮기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르코의 첫사랑은 끝이 났고, 의조는 좁은 세계를 벗어나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난다. 소마는 지상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 속에서 유오의 클론과 함께 밤하늘을 바라본다.

세계는 그대로지만, 사람은 변한다.

제각각의 이야기처럼 보였지만, 결국 하나로 이어진 이야기였다는 감상을 남기며... 괜찮게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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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은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청예의 『주와 연』의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은 복수로 흘러간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소설의 중심에 있는 것은 ‘복수’보다는 ‘인연’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수를 위해 시작된 관계들이 또 다른 관계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이어진 인연들이 다시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포일러 포함---

특히 주희라는 인물을 생각하면 이 작품에서 말하는 인연이 더욱 흥미롭게 느껴진다. 주희는 스스로를 재앙이자 형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자신이 연린이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연린이의 삶에서 이어진 수많은 인연을 만들어낸 것은 결국 주희였다. 주희가 아니었다면 은정과 이현을 만날 일도, 그들과의 관계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이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연린이의 몸을 빌려 살아가고 있는 주희는 자신을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여섯 번째 손가락’처럼 여기지만, 결국 그 삶 속에서 수많은 인연을 만들어낸 사람 역시 주희였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에 주희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여섯 번째 손가락’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로 한 결말이 좋았다. 물론 마지막의 은정은 끝까지 은정다웠다. ‘너와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또 다른 선택을 해버리는 모습이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부터 얼마나 비틀려 있었는지를 다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결말 이후의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린이가 앞으로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를 과연 온전히 자신의 아이로 바라볼 수 있을까? 만약 그 아이에게도 윤회와 인연이라는 것이 이어진다고 생각한다면, 그 아이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이어받은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연린이와 이현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오히려 작품이 완전히 답을 제시하지 않고 열린 결말로 끝난 것이 좋았던 것 같다. 독자가 그 이후의 인연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와 연』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단어들은 업보와 윤회였다. 특히 윤회라는 개념처럼 한 번 맺어진 인연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다시 이어지고, 서로 엮이는 과정이 오묘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인연은 단순히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에 흔적을 남기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사랑과 의존은 어디에서 구분되는 것일까.

나는 이 작품에서 은정은 연린이를 ‘의존’했고, 이현은 연린이를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은정과 연린이의 관계는 결핍과 복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관계로 유지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은정에게 연린이는 자신의 과거를 이해하고 자신의 추악한 마음까지 받아들여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린이를 놓으면 다시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이 있었을 것이고, 그 불안이 연린이에 대한 의존과 집착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궂은 날씨에 연린이에게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했던 행동도 그런 의존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렇게까지 귀찮게 행동하더라도 너는 나를 위해 와줘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연린이가 자신을 데리러 와주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여전히 이 사람에게 중요한 존재다’라는 것을 확인하고 만족했을 수도 있다.

반면 이현은 연린이를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기보다는 자신이 연린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 헤어진 이후에도 힘들어했고, 다시 만났을 때도 연린이를 쉽게 모질게 내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둘의 차이를 보면서 의존에는 집착이 수반되고, 사랑에는 의지가 수반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상대가 나에게 계속 필요한 존재이기를 바라는 것이 의존이라면, 상대가 필요할 때 자신을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랑에 조금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또 하나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관계가 끝나면 그 관계의 의미도 사라지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그 관계의 의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관계가 끝나는 순간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까지 모두 무의미해진다면, 그 사람과 보낸 시간들은 결국 전부 허송세월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 시간을 살아온 나 자신에게 너무 잔혹한 일인 것 같다.

좋게 끝난 관계든 나쁘게 끝난 관계든 그 관계 속에서 느꼈던 감정은 모두 진실이었다. 함께 나누었던 대화나 소소한 행동들도 당시에는 온 마음을 다해 했던 것들이다. 심지어 악연이 끝난 뒤 느끼는 ‘속 시원하다’는 감정조차 그 관계가 남긴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립고 애틋한 관계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관계가 끝난 뒤에도 어떤 형태로든 뒷맛이 남는다면, 그것은 이미 내 삶에서 의미를 가진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주희와 은정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한 이후에도 주희는 은정을 떠올렸고, 첫 번째 엄마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관계가 되었음에도 엄마에 대한 생각을 계속했다. 관계는 끊는다고 해서 칼로 자른 듯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연린이의 삶을 보면 이러한 점이 더욱 선명해진다. 교습학원 선생님부터 친부모, 주희의 친모, 할머니, 그리고 은정까지 연린이의 삶에 등장한 사람들은 대부분 연린이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계획한 관계였다. 복수가 끝나면 더 이상 그들과 관계를 이어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주희에게는 미약한 죄책감과 기억이 남았다. 만약 관계가 끝나는 순간 그 관계의 의미까지 사라지는 것이라면, 복수가 끝난 이후에도 주희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갈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관계가 끝나더라도 그 관계 속에서 느꼈던 감정과 기억은 남는다. 시간이 흐르면 그 의미가 흐릿해질 수는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억을 잃지 않는 한 언젠가 ‘그때는 그런 일이 있었지’라고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경험, 그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감정까지 모두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심리상담사나 프로파일러라고 해도 다른 사람의 삶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이해한다기보다는 ‘읽는 것’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이야기를 듣고 ‘아, 그래서 그렇게 행동했구나’라고 납득하는 것이다. 나는 납득과 이해는 꽤 다르다고 생각한다.

주희도 은정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은정 역시 주희의 삶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현도 마찬가지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사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는 너를 이해해’라는 말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각자의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관계를 이어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와 연』의 인물들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했다기보다 서로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간 것에 가깝다고 느꼈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관계의 조건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끝내 이해할 수 없는 부분까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결국 『주와 연』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게 된 인연은 반드시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를 의미하지 않았다. 인연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에 흔적을 남기는 과정 자체일지도 모른다. 관계는 끝날 수 있고, 사람은 서로의 삶에서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했던 시간과 그때 느꼈던 감정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인연을 끝까지 붙잡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게 남은 인연의 흔적을 인정하고, 그 흔적을 품은 채 그 관계와는 별개의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결국 주희가 마지막에 선택한 것도 그런 삶이 아니었을까.

복수로 시작된 이야기였지만, 마지막에 남은 것은 복수의 완성이 아니라 인연이 남긴 흔적과 그 이후에 살아가야 할 자신의 삶이었다.

주와 연

청예 지음
래빗홀 펴냄

4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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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ekikneunsangeo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

‘나’를 찾지 못한 청년들에게 바치는 이야기.
정유정 작가의 소설은 나랑 그닥 맞지 않아서 안 읽었었는데, 『내 심장을 쏴라』는 유명한 소설이기도 하고, 리뉴얼된 표지가 너무 내 취향이라서 마음 잡고 읽게 됐다. 그리고 결국 최애 소설 탑 쓰리에 들어갈 정도로 깊게 남았다.

사실 초반 1~20페이지까지는 재미가 없다. 내가 초반 페이지를 대충 읽는 경향이 있기도 했고, 내용 급전개와 등장인물이 많은 점이 겹쳐 이해가 조금 힘들었다. 이 이야기는 병동에서부터 시작된다. 수명이 병동에 오게 된 이유와 그 이전의 이야기는 서두를 여는 정도이고, 본격적인 시작은 병동에 도착한 이후라고 느껴졌다.

수명이 ‘자기 자신을 잃고 방황하던 존재’라면, 승민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 싸우는 존재’다. 수명은 그런 승민을 지켜보면서 자기 자신을 찾기 시작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승민을 만나기 전, 수명은 병동에 입원한 채 시키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으며, 그저 눈에 띄지 않게 무던하게 지내왔다. 그러던 중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도 해버리는 승민을 만나게 된다.

[이제 빼앗기지마. 네 시간은 네 거야.]

누구도 누구의 편이 아니던, 보호사의 의미가 퇴색된 공간 속에서 승민은 수명에게 눈이 되어주고, 자유 그 자체가 되어주었던 존재였다. 그리고 수명은 그런 승민을 통해 자신이 빼앗겨왔던 시간을 인지하게 된다. 수명은 언제든 준비가 되면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기 자신’이라는 벽에 막혀 그 자유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시간은 현재가 아니라, 어머니를 잃었던 그 시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한마디 이후로 수명은 승민에게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을 것이다.

[뚫고 나갈 곳이 없었다. 멈출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가까웠다. 결정적으로, 멈추는 법을 몰랐다. 승민은 내게 질주만을 가르쳤다. 그러니 질주할 밖에.]

수명이 자기 자신의 의지로 자유를 향해 뛰기 시작한 순간이다. 수명은 승민에게 눈이 되어주었고, 승민은 수명에게 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멈추지 않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자유를 위해 싸우는 법을. 오직 죽음만이 나의 자유를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극단적이면서도 강렬한 방식으로 말이다.

단 한가지… 승민의 ‘비행’은 진정한 ‘자유’가 맞을까?
승민이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선택한 마지막 비행, 승민은 수명에게 자유를 찾아주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자유는 돌려받지 못한 게 아닐까…

[그럼 우리는 이수명 씨의 첫 비행을 지켜본 사람들인가요?]

승민은 자유를 위해 마지막 비행을 선택했고, 수명은 그 비행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이제 수명의 비행은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단순한 탈출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찾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느껴졌다.

작품을 읽기 전에는 이 작품이 단순히 ‘자아찾기’인줄 알았다. 물론 자아 찾기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 더 깊고 강렬한 자유를 위한 투쟁이 작품 속에 녹아 들어 있었고, 그 속에서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널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지.’, ‘너는 너의 자유를 찾았고’, ‘너는 너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 질문 속에서 답을 찾는건 제법 오래 걸릴 듯 싶다…. 내가 지금 날 위한 투쟁을 하고, 자유를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확실한건 내 시간은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내게 승민 같은 사람은 없었지만, 인간이란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투쟁하기 위한 존재로 만들어졌으므로… 승민은 그저, 수명이의 안에 잠들어있던 그 존재를 깨워줬을 뿐, 없던 것을 만들어내 준 것은 아니다.

언젠가 내 안에 있는 용기도 승민과 수명처럼 날아오를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날이 온다면,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내 인생을 정면으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비로소, ‘나의 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내 심장을 쏴라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 펴냄

4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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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ekikneunsangeo

“너는 살아. 오래. 행복하게.”

소설의 주제를 읽어보지 않고, 제목 하나만 보고 책을 골랐다. 아포칼립스물이라는 것도 모른 채. 처음에는 평범한 현대물이라 생각하며 읽다가, 몇 페이지쯤 지나서야 다른 세계라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성장물인가 싶었지만, 끝까지 읽고 나니 이 이야기는 성장보다는 사랑에 가까웠다.

수많은 여름이 반복되어도 나를 살게 해주는 단 한 사람.

이 문장은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사랑은 숭고하다. 현실에서는 쉽게 존재하기 어려운,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다. 결핍으로 시작된 관계가 이토록 간절해질 수 있을까.

일록과 이록, 주홍과 연두, 그리고 백금. 두 종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착취와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도, 그들은 사랑 하나로 진실을 감추고 서로를 지켜낸다.

서로의 결핍으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결국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원망과 미움을 감수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내어주면서까지 끝내 서로를 지켜낸다는 점에서, 그 사랑은 더욱 선명해진다.

결국 이 작품이 내게 던지는 질문은 단 하나다. 사랑은 어떻게 사람을 살게 만드는가.

작품 속 사랑은 거룩하고 아름답지만, 동시에 또 다른 의문을 남긴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일록과 이록의 삶은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이것이 사랑이라면, 누구를 위한 사랑인 것일까. 사랑은 반드시 희생을 전제로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록은 주홍이 필요했고, 일록은 연두가 필요했다. 이록에게는 신체적 결핍이, 일록에게는 관계의 결핍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의존했고, 그만큼 사랑했다. 오직 그 사람만이 자신의 삶의 이유가 될 정도로.

결핍에서 시작된 사랑은 아름답다.
아름답고, 동시에 비극적이다.

일억 번째 여름

청예 지음
창비 펴냄

5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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