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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지음
까치 펴냄

읽었어요
《소유냐 존재냐》는 좋게 말하면 철학 에세이에 가깝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계발서인 척하는 철학서에 가깝습니다. 많은 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삶의 조언을 주는 책을 기대하고 읽으시겠지만, 실제 내용은 자본주의 비판, 종교, 사회 전체의 변화 같은 훨씬 큰 철학적 담론을 다룹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을 완전히 철학서로 읽으려고 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철학서라면 ‘소유’와 ‘존재’라는 핵심 개념이 어디까지 구분될 수 있는지, 그 구분이 반례 앞에서도 유지되는지, 앞선 철학적 논의들과 어떻게 충돌하거나 이어지는지까지 꽤 엄밀하게 다뤄야 합니다. 그런데 《소유냐 존재냐》는 이런 개념들을 치밀하게 따져 나가기보다는, 소유와 존재를 삶의 두 방향으로 크게 나누고 그 대비를 통해 독자를 설득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메시지는 분명하지만, 그만큼 단순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또한 순환 논리도 존재합니다. 프롬은 소유 양식에서 벗어나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는 모습마저 하나의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책에 나온 예시를 생각해 봅시다. 내가 수업 전에 미리 공부하고 교수님과 건설적인 대화를 하는 ‘존재 양식적 학생’이 된다고 해도, 결국 나는 “그런 멋진 학생인 나”라는 이미지를 소유하게 됩니다. 기부나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하게 소유를 벗어난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나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자기 만족이나 정체성의 소유가 따라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소유에서 벗어나 존재로 나아간다는 프롬의 구분은 생각보다 깔끔하게 나뉘지 않습니다. 존재하려는 태도조차 결국 또 다른 방식의 소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자기계발서로 읽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철학서로 읽기에는 논리가 성긴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에는 분명한 의의가 있습니다. 세계대전을 겪고, 유럽에서는 “인간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실존주의적 분위기가 강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사르트르의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이나 카뮈의 《이방인》, 사르트르의 《구토》 같은 작품들이 그 시대의 불안과 허무를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런 철학 작품을 직접 읽고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프롬은 당시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조금 더 대중적인 삶의 언어로 바꾸어 제시한 사람입니다. 실존주의가 “인간은 정해진 본질보다 먼저 존재하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을 만들어 간다"라고 말한다면, 프롬은 이를 “무엇을 소유하느냐보다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중요하다"라는 방식으로 풀어낸 것 같습니다. 즉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라는 추상적인 명제를, “존재가 소유에 앞선다"라는 보다 현실적인 삶의 태도로 바꾼 셈입니다.

​ 물론 논리적으로 허술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의 문제를 일반 독자들이 자기 삶에 비추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소유냐 존재냐》는 여전히 의미가 있는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이 책은 완성도 높은 철학서라기보다는, 전후 시대의 불안과 실존주의적 고민을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번역한 책에 가깝습니다.

서평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340784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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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녹나무라는 소재는 여러 가지를 상징하고 의미합니다. 그러나 녹나무라는 소재가 세계관 속에서 갖는 역할은 굉장히 명확하죠. 예념과 수념을 통해 가족들이 서로의 '념', 즉 생각을 주고 받을 수 있게 해주는 마법과도 같은 장치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생각 속에 부끄러운 이야기들도 있다고 생각해 일종의 유언처럼 작용하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가족들끼리도 사용이 가능하죠.

결국 저희는 여기서도 제가 항상 현대 소설과 현대 철학을 논할 때 자주 다루는 주제인 언어와 생각의 괴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완전하지 못합니다. 제가 느끼고 있는 감정과 100퍼센트 똑같은 의미를 갖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죠. 동시에 행복하다와 happy 가 모든 감정적 요소가 빠짐없이 대응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중략)

이 소설을 읽게 되면 녹나무의 영험함과 대단함이 표면적으로 보이지만 깊게 파고들면 사실 이 녹나무가 필요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소설에 나온 두 경우는 녹나무였기에 벌어진, 정말 감동적이고 언어를 뛰어넘은 서사이지만 마지막의 레이토와 치후네의 경우는 또 다릅니다. 녹나무 역시 그들의 교류에 큰 도움을 주지만 굳이 녹나무 없이도 마지막에 레이토는 치후네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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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을 위의 이해와 연결해보면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언어의 한계를 인지하고 언어를 뛰어넘어 생각을 전할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으로 이 소설을 시작했습니다. 언어에 의해 폭력적으로 재단된 생각들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점점 상실하고 그렇지 않은 순수한 생각을 전하는 녹나무는 영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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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설 밖에 있는 실제 세상에 이런 녹나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한 절망적인 공간인걸까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언어에 대한 한계를 끄집어내는데 그치지 않고 이 질문에 대해서 아니다라는 답 역시 소설을 통해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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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기본적으로 인간의 소통이 언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레이토가 치후네에게 치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과정은 단순히 언어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녹나무의 도움도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 사건들, 행동들, 언어들이 모두 통합되어 레이토가 눈치를 채게 된 것인데요. 비언어적 소통은 언어적 소통보다 불확실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 잘 보이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401122872

녹나무의 파수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소미미디어 펴냄

읽었어요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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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서점이나 SNS에서 자주 눈에 띄는 고전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입니다. 오래전에 쓰인 작품임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이야기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이 책을 찾는 것 같습니다.

『싯다르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강입니다. 싯다르타는 어릴 적 강에서 목욕재계하는 법을 배웠고, 금욕의 세계에서 감각의 세계로 삶의 단계를 넘어가는 지점에서도 강을 만납니다. 세속적인 삶에 절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을 때에도 강은 싯다르타를 다시 살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강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느꼈습니다.

“강에는 다만 현재만 있을 뿐 과거의 그림자도 미래의 그림자도 없다.”

우리는 보통 과거와 현재, 미래를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후회가 있고 미래에는 불안이 있습니다. 하지만 강은 그런 구분 없이 그저 흐릅니다. 어제 흘렀던 물과 지금 흐르는 물, 앞으로 흘러갈 물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은 현재이면서 동시에 과거이고 미래이며, 삶의 시작이면서 끝이기도 한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은 자연스럽게 작품의 핵심 개념인 ‘단일성’과 연결됩니다.

사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도 바로 이 단일성이었습니다. 작품에서는 선과 악, 삶과 죽음, 윤회와 열반을 서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심지어 시간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이 부분을 ‘모든 존재는 변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 현재의 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몇 번 다시 읽어보니, 헤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근본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 돌멩이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이 돌멩이가 언젠가는 이런저런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그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젠가’가 아니라 ‘이미’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돌멩이가 언젠가 다른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다른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존중하는 것입니다. 결국 『싯다르타』에서 말하는 단일성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이 언젠가 하나가 된다는 뜻이라기보다, 애초부터 모든 것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삶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서평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394245323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지음
민음사 펴냄

4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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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시몬이 교회 옆에 쓰러져 있던 미하엘을 발견하면서 시작됩니다. 가난한 구두장이 시몬은 처음에는 낯선 미하엘을 외면하려 하지만, 결국 그를 지나치지 못하고 자신의 옷을 벗어준 뒤 집으로 데려옵니다. 아내 마트료나 역시 처음에는 화를 내지만 곧 마음을 열고 미하엘에게 음식과 옷을 내어줍니다. 그 모습을 본 미하엘은 처음으로 미소를 짓습니다.
이후 미하엘은 시몬에게 구두 만드는 법을 배우며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어느 날 한 부유한 신사가 찾아와 오래 신을 수 있는 튼튼한 장화를 주문합니다. 하지만 미하엘은 장화 대신 장례용 슬리퍼를 만듭니다. 시몬은 당황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사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신사의 하인은 장화 대신 장례용 슬리퍼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미하엘은 이미 완성해 둔 슬리퍼를 건넵니다. 이때 미하엘은 두 번째 미소를 짓습니다.
그로부터 6년 뒤, 한 여인이 두 소녀를 데리고 구두를 맞추러 찾아옵니다. 여인은 두 아이의 친어머니가 아니었지만,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친딸처럼 사랑하며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미하엘은 세 번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사실 그는 하느님의 명을 받고 인간 세상에 내려온 천사였습니다. 그는 과거 두 소녀의 친어머니의 영혼을 거두라는 명을 받았지만, 어린아이들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불쌍히 여겨 명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이에 하느님은 미하엘에게 인간 세상에서 세 가지 진리를 깨달은 뒤에야 하늘로 돌아올 수 있다고 명합니다. 그 세 가지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습니다.

미하엘이 찾은 답은 무엇이었을까요? 서평에서 함께 살펴보시죠.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37405068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민음사 펴냄

읽었어요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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