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구원은 누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요?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종교적 모순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규범의 모순이라는 관점으로 확장해 살펴보았습니다.
<벌레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한의 감정은 결국 용서의 권리에 의한 것입니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를 하지 못했는데 그 가해자는 피해자가 아닌 신에게 용서를 받고 구원받는 것에서 오는 무력감과 슬픔이 중요한 감정이죠. 사실 이 이야기,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와 뭐가 다른지 생각해보시겠어요?
A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의 딸이 최근에 고등학생 3명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결국 자살하게 되었다. 이 A는 굉장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지만 국가는 이들을 보호 관찰을 하게 되며 복수하지 못했고 법의 판결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이 고등학생들이 매일같이 쓴 반성문은 A는 읽어보지도 못했지만 판결에 영향을 미쳤고, A가 상상할 수 조차 없던 수준의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지게 된다.
복수는 국가의 것, 신의 것이며 용서 역시 국가의 것이며 신의 것입니다. 이러한 시스템은 어마어마하게 억울하고 슬픈 개인을 탄생시키지만 몇천년간 유지되어온 사회들의 사례를 볼때 가장 합리적이며 집단이익적입니다. 이 소설의 내용은 단순히 종교의 모순을 다루고 기독교를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회를 가장 합리적으로 굴러가게 만드는 오래된 규범의 시스템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말도 안되는 개인적 모순을 담은 소설입니다. 그러나 이 개인적 모순은 집단을 위해 탄생한 규범이라는 이름 앞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벌레이야기>의 서술자와 직장인 A 같은 사람들은 몇천년 간 몇천 명이 존재했지만 이 규범의 존재는 유지됩니다.
규칙, 법, 이런 모든 것들은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이 합리성을 개개인에게 적용되는 합리성으로 착각하고는 합니다. 규범은 사회의 계약으로서 탄생했고 규범은 사회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빼았는 합리성을 발휘합니다. 종교고 법이고 모두 이런 장면 앞에서는 침묵합니다. 규범은 집단적으로 선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들로 인해 규칙을 없앤다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규범을 지키는 것과 알지 못한 채 지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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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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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는 좋게 말하면 철학 에세이에 가깝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계발서인 척하는 철학서에 가깝습니다. 많은 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삶의 조언을 주는 책을 기대하고 읽으시겠지만, 실제 내용은 자본주의 비판, 종교, 사회 전체의 변화 같은 훨씬 큰 철학적 담론을 다룹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을 완전히 철학서로 읽으려고 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철학서라면 ‘소유’와 ‘존재’라는 핵심 개념이 어디까지 구분될 수 있는지, 그 구분이 반례 앞에서도 유지되는지, 앞선 철학적 논의들과 어떻게 충돌하거나 이어지는지까지 꽤 엄밀하게 다뤄야 합니다. 그런데 《소유냐 존재냐》는 이런 개념들을 치밀하게 따져 나가기보다는, 소유와 존재를 삶의 두 방향으로 크게 나누고 그 대비를 통해 독자를 설득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메시지는 분명하지만, 그만큼 단순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또한 순환 논리도 존재합니다. 프롬은 소유 양식에서 벗어나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는 모습마저 하나의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책에 나온 예시를 생각해 봅시다. 내가 수업 전에 미리 공부하고 교수님과 건설적인 대화를 하는 ‘존재 양식적 학생’이 된다고 해도, 결국 나는 “그런 멋진 학생인 나”라는 이미지를 소유하게 됩니다. 기부나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하게 소유를 벗어난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나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자기 만족이나 정체성의 소유가 따라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소유에서 벗어나 존재로 나아간다는 프롬의 구분은 생각보다 깔끔하게 나뉘지 않습니다. 존재하려는 태도조차 결국 또 다른 방식의 소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자기계발서로 읽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철학서로 읽기에는 논리가 성긴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에는 분명한 의의가 있습니다. 세계대전을 겪고, 유럽에서는 “인간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실존주의적 분위기가 강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사르트르의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이나 카뮈의 《이방인》, 사르트르의 《구토》 같은 작품들이 그 시대의 불안과 허무를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런 철학 작품을 직접 읽고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프롬은 당시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조금 더 대중적인 삶의 언어로 바꾸어 제시한 사람입니다. 실존주의가 “인간은 정해진 본질보다 먼저 존재하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을 만들어 간다"라고 말한다면, 프롬은 이를 “무엇을 소유하느냐보다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중요하다"라는 방식으로 풀어낸 것 같습니다. 즉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라는 추상적인 명제를, “존재가 소유에 앞선다"라는 보다 현실적인 삶의 태도로 바꾼 셈입니다.
물론 논리적으로 허술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의 문제를 일반 독자들이 자기 삶에 비추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소유냐 존재냐》는 여전히 의미가 있는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이 책은 완성도 높은 철학서라기보다는, 전후 시대의 불안과 실존주의적 고민을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번역한 책에 가깝습니다.
서평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340784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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