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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
민음사 펴냄

[발췌한 책 속 문장]

P26 시 당국은 아무런 제안도 마련한 것이 없었고 전혀 아무런 대채도 세운 것이 없었지만, 우선은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회의를 열기로 했다.

P57 유리창의 저 편에는 봄의 신선한 하늘이 떠 있었고 그 이편에는 아직도 방안에서 반향하고 있는 ‘페스트’라는 한마디 말이 있었다.

P94 말하자면 이 질병의 무지막지한 침범은, 그 첫 결과로서 우리 시민들을 마치 사적인 감정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P95 이해와 정과 살로써 맺어졌던 사람들이, 이제는 겨우 열 마디 정도가 고작인 전문(電文)의 대문자 속에서 그 옛정의 흔적을 더듬어 보게끔 되었다.

P225 이처럼 외관적으로는 포위된 상태 속에서의 연대책임을 시민들에게 강요하던 질병은 동시에 전통적인 결합 형태를 파괴하고 개개인을 저마다의 고독 속으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P237 페스트가 2단계에 접어들자 그들은 기억력조차도 상실해 갔다. 그 얼굴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결국은 같은 이야기지만, 그 얼굴에서 살이 없어져 그 얼굴을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알아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P239 페스트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심지어 우정을 나눌 힘조차도 빼앗아 가 버리고 말았다.

P251 천만에, 그는 인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인정으로 해서 그는 매일 스무 시간을, 살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광경을 참고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인정으로 해서 그는 매일 같은 일을 다시 시작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꼭 그만큼의 인정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P257 걷잡을 수 없이 물가가 상승하고 있었지만, 그때만큼 사람들이 돈을 낭비한 적은 없었으며, 또 대부분의 경우 생활필수품이 부족했던 때에, 그때처럼 사치품이 많이 소비된 적은 없었다.
=> 내일이 불확실해질 때 사람들은 낭비를 택했다. 소비로 절망을 달래는 모습.

P257 페스트는 고독하면서도 고독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범자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하나의 공범자이며, 그것도 즐겨 그러기를 원하는 공범자이기 때문이다.

P259 주민들은 자기들을 서로 가깝게 만들어주는 따뜻한 것을 절실히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자기들을 서로 멀어지게 만드는 경계심 때문에 그런 요구에 감히 자신을 내맡기지 못하고 있었다.
=> 상대가 위로의 원천이지만 감염의 경로이기 때문에 인간은 다가서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소설의 집필에서 70여 년이 지난 2020년대 초반, 지구촌의 후손들은 이 현상을 겪는다.

P262 무대 위에는 전신의 관절들이 풀려 버린 광대의 모습으로 분장한 페스트, 그리고 관람석에는 붉은 의자 덮개 위에 잊어버린 채 놓고간 부채며 질질 늘어진 레이스 세공품들의 모습으로 지금은 아무 쓸모가 없어진 사치. 그것이 바로 그들 삶의 이미지였다.
=> 예술이 재앙을 재현하던 무대 위로 재앙이 직접 올라온다. 병마는 재현과 실재의 경계를 허문다.

P284 “정말 우리 힘에는 도가 넘치는 일이니 반항심도 생길 만합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P284 “아닙니다, 신부님.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달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 리유는 아이를 고문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면 그 질서를 거부하겠다고 밝힌다.

P286 “내가 증오하는 것은 죽음과 불행이라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든 원하시지 않든 간에 우리는 함께 그것 때문에 고생을 하고, 그것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P291 지옥에 빠진 돈 후안과 어린애의 죽음을 놓고 볼 때 탕아가 벼락을 맞아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린애가 고통을 받는 것은 이해할 수 없으니 말이다.

P306 그런데 실상 페스트의 기세등등한 불꽃은 화장터의 화덕에서 매일같이 더 신바람을 내며 타고 있었다. 사실 날마다 사망자 수가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페스트는 이제 그 정점에 편안히 자리 잡고 앉아서, 착실한 고나리처럼 매일매일의 살인에서 정확성과 규칙성을 과시했다.

P314 기차역에서나 볼 수 있는 조그만 전기 자동차 두 대가 천막 사이로 커다란 냄비를 싣고 다녔다. 사람들은 팔을 내밀어서 국자 두 개를 그 두 냄비에 담갔다가 두 개의 식기에 갖다 쏟았다. 차는 다시 움직였다. 다음 천막에서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이었다. “과학적이군요.”하고 타루가 소장에게 말했다. “그렇습니다.”하고 소장은 그들의 손을 잡으면서, 만족스러운 듯 대답했다. “과학적입니다.”
=> 인간이 가축처럼 사료를 받는 모습을 타루는 ‘과학적’으로 비꼬지만, 소장은 효율성에 대한 칭찬으로 받아들여 흡족해한다.

P326 “총살형 집행반은 뜻밖에도 사형수로부터 일 미터 오십센티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사형수가 두 걸음만 앞으로 나가면 가슴에 총부리가 부딪치는 것을 아시나요?”

P334 몇 분 동안 그들은 같은 리듬, 같은 힘으로 세상을 멀리 떠나, 단둘이서 마침내 도시와 페스트에서 해방이 되어서 전진했다.

P339 그해의 크리스마스는 복음서의 명절이라기보다 차라리 지옥의 명절이었다. 텅 비고 불이 꺼진 가게들, 진열장 속에 있는 모형 초콜릿이나 빈 상자들, 음울한 얼굴들을 실은 전차들, 어느 것 하나 과거의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키는 것이라곤 없었다.
=> 형식은 남았으나 내용물은 없다. 재앙 속의 일상이 얼마나 허망한지.

P345 여기저기 서까래 위에서 몇 달을 두고 잊고 살았던 바스락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리유는 매주 초에 실시되는 총괄적 통계의 발표를 기다렸다. 통계는 병세의 후퇴를 표시하고 있었다.
=> 쥐가 죽음은 재앙의 전조였고, 쥐의 생존은 재앙의 후퇴를 암시한다. 생명의 신호가 혐오스러운 존재의 소리로 나타난다.

P355 그래서 1월 25일 저녁에는 희색이 넘치는 흥분이 시가를 가득 채웠다. 지사는 전반적인 기쁨에 동조하기 위해서 건강 시대 때와 마찬가지로 등화 관제를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우리 시민들은 차고 맑은 하늘 아래, 불이 환하게 켜전 거리로 떠들썩하게 무리를 지으며 웃으면서 쏟아져 나왔다.

P356 그런데 피로 때문인지 그들은 그 덧문들 뒤에서 아직도 계속되는 그 괴로움을, 거기서 좀 더 먼 곳의 거리거리를 메우고 있는 기쁨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다. 다가오는 해방은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 닫힌 덧문 뒤에서는 누군가의 고통이, 열린 거리에서는 환호가 있다.

P361 왜냐하면 초기의 승리의 열광이 사라지자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의심이 되살아나서, 도청의 발표에 흥분했던 마음에 그늘을 드리웠기 때문이다. 코타느를 그처럼 시민들이 불안해하는 것을 보고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 범죄자인 코타르는 재앙의 회복에서 위협을 느낀다. 병마가 걷히기 때문에, 체포의 그물이 코타르를 노리게 되기 때문이다.

P366 투쟁을 위해서 묶어 놓았던 힘의 다발을 자연스레 솟아나는 감정 속에서 하나하나 풀어 간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P376 그에게 그렇게도 친근했던 그 인간의 모습이, 지금은 창 끝에 찔리고 초인간적인 악으로 불태워지고 하늘의 증오에 찬 온갖 바람에 주리 틀리면서 바로 그의 눈앞에서 페스트의 검은 물결 속으로 빠져들어 갔지만, 그로서는 이 난파를 막는 데 속수무책이었다.
=> 페스트의 마지막 물결에서 누구보다 숭고하게 싸웠던 자가 희생되었다.

P380 리유의 어머니는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사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울지 말라고 하고,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몹시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 그는 다만 자신의 고통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여러 달 전부터, 그리고 이틀 전부터 계속되어 왔던 똑같은 아픔이었다.
=> 몇 달의 이별로 리유의 마음은 닳을 대로 닳았다. 리유는 통곡하지 않지만, 그러기에 그의 애도는 더 가슴 아프다.

P381 시의 문들은, 2월의 어느 화창한 날 아침, 시민들과 신문과 라디오와 도청의 발표문이 환호하는 가운데 마침내 열렸다. 그러므로 서술자에게 남은 일은, 비록 자신은 거기에 완전히 섞여서 기뻐할 자유가 없었던 사람들 중 하나이긴 했지만, 시의 문이 개방되던 기쁜 순간의 기록자가 되는 일이다.
=> 서술자의 정체에 대한 마지막 복선이다. 기뻐할 자유가 없는 서술자는 기쁨의 기록자가 되는 이중성.

P385 도시 전체가 밖으로 쏟아져 나와서, 고통의 시간은 종말을 고했지만 망각의 시간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그 벅찬 순간을 축복하고 있었다.
=> 애도와 환희의 공존

P392 이 연대기도 끝이 가까웠다. 이제 베르나르 리유는 자기가 이 연대기의 서술자라는 것을 고백해야 할 때가 되었다.
=> 모든 시민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과 같은 거리에서 기록하겠다는 일념으로 리유는 익명의 서술자라는 결단을 내렸다.

P401 그래도 그는 이 연대기가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기록은 다만 공포와 그 공포가 지니고 있는 악착같은 무기에 대항하여 수행하 나가야 했던 것, 그리고 성자가 될 수도 없고 재앙을 용납할 수도 없기에 그 대신 의사가 되겠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행해 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일 뿐이다.

P417 다시 말해서 ‘연대기’라는 형식을 통해서 페스트라는 질병의 육체적이고도 현실적인 곹오을 생생하게 살려 내는 동시에 그것을 통해 산출해 낼 수 있는 작품의 ‘상징적’ 의미는 훨씬 광범하고 다양한 동시에 보편적인 것에까지 확대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P434 사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있는 그대로의 작가가 아니라 그의 내면의 갈등과 모순과 이상을 깨어진 거울 조각들처럼 여러 각도로 비쳐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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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 코멘트]

『레드불 스파』는 대한민국의 급소를 정확히 찌르는 소설이다. 관심으로 연명하는 삶, 재난에도 멈추지 않는 시스템, 좀비와 구별되지 않는 대한민국 국민의 일상을 사우나 속에서 가격한다. 다른 여주인공 쌈루타의 설정이 헐거운 면이 있지만, 세상이 끝나는 밤에도 700그램을 빼야 하는 현지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 이를 금방 잊게 되었다.

[발췌한 책 속 문장]

54p 그러나 하나의 후회는 언제나 극도의 연쇄적 힘을 가지고 있다. 마치 유치원 다니던 시절 만들었던 색종이 사슬처럼, 둥그렇고 쨍한 색의 후회는 또 다른 후회로 계속해 이어진다.

59p 먹고사니즘이란 원체 중요하고, 한국인들은 그 무슨 일이 일어나도 꾸역꾸역 직장으로 향하는 민족으로 또 유명하니까.
=> 악천후 속에서도 학교로 향하고, 직장으로 향하는 한국인들이 찍힌 뉴스 자료 영상들이 떠오른다.

97p 손님에게 먼저 퍼 드려야 하는 동방예의지국의 사람들이 내뱉는 저열한 속내들.
=> 동방 예의의 겉면으로 덮어도 인간의 심리 본질은 쉽사리 바뀔 수 없다.

119p 비열할 정도로 치열하게 사는 사람의 두 콧구멍에선 이산화탄소가 남들보다 두어 배는 풍풍 뿜어져 나오지 않을까. 그럼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전 지구의 안위를 위해서는 훨씬 이롭지 않으려나.
=> 신체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는 같을지라도, 그 인간의 악행으로 배출되는 공해 물질은 일반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수 있다.

137P 언제나 그렇듯 실컷 사고를 친 하이드가 책임도 안 진 채 퇴장하고 나면, 왜소한 지킬이 비척비척 등장해 비로소 자기 인식을 시작하기 마련이었다.

139P 선수의 운동만큼이나 중요한 게 그 윗사람들의 정치였다. 승유는 지현을 이 자리까지 올리기 위해, 그리고 이 시합을 성사시키기 위해 수많은 골프 모임과 식사 자리 및 술자리에 불려 다녔다고 했다.
=> 승유가 지현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 같지만, 승유도 고충이 있었다. 원치 않은 술자리와 회식은 정말로 야만적이다.

149P 매일 죽고 싶다 염불을 외면서도 그 정도의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사람이 흔한가? 전혀.

152P 평소에 느끼는 당혹감과 분노를 쏟아부어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대상이 사람들에겐 필요했다.
=> 돌팔매질은 원시 시절부터 내려온 전통.

162P “이제는 말도 잘하는 좀비들이 천지라고, 하룻밤 만에.”
=> 세계관 속 사회 활동이 가능한 좀비 바이러스는 어떤 연유로 탄생했을까? 그리고 좀비가 나타나도 시합을 강행하는 세계관 속 대한민국의 높으신 분들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172P 그 어떤 판이든, 그 무슨 일이든 그걸 감싸고 있는 외피는 서로 다를지 몰라도 구조는 동일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직감하고 있었다.

197P 덕질이란 티백으로 차를 우려내는 일과 같아서, 몇 번이고 우릴 수 있고 수만 번을 반복해도 미세한 알갱이가 남아 있기 마련이었다.
=> 어떻게든 떨쳐내려 해도 약간의 관심의 재가 남아 있으면, 덕질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다.

202P 어려서부터 새벽마다 맨발의 승려에게 공양하며 불심을 쌓아 왔던 쌈루타는, 어디서든 잘못되거나 가여운 장면을 묵인하는 순간 윤회의 수레바퀴에 쌓일 업보를 걱정하며 살아왔다.
=> 업보론은 수많은 데이터베이스가 있기 때문에 그 힘과 역사를 인정받는다.

레드불 스파

설재인 지음
한끼 펴냄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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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 코멘트]

# 5번 레인의 의미
수영 결승에서 레인 배정은 예선 기록 순이다. 1위가 물살이 가장 안정된 한가운데 4번 레인을 받고, 2위가 그 옆 5번 레인에 선다. 즉, '5번 레인'은 챔피언의 자리가 아니라 도전자의 자리다. 8년을 수영해 온 에이스 나루가 라이벌 초희에게 자꾸 2등으로 밀리는 자리이기도 하다.

# 주인공 스스로 반성하고 사과하기
소설을 관통하는 중요한 사건은 수영복 절도다. 초희에게 거듭 밀리던 나루는 열등감 속에 초희의 수영복을 훔친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이후 수영복을 돌려준다. 그와 동시에 진심 어린 사과와 편지를 건네며 작품 말미엔 수영 대회 경쟁으로 화해한다. 어린이문학에서 주인공은 대개 '착한 아이'이거나 잘못해도 실수 수준인데, 작품에서 주인공은 명백한 절도를 저지른다. 그리고 그 잘못을 우연한 발각이나 어른의 개입이 아니라, 나루 자신의 직면과 고백과 회복으로 통과한다.

# 도약의 발판, 5번 레인
결국 소설은 나루를 끝내 1등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마지막 대회에서도 나루는 초희에게 밀리지만, 이번에는 그 2위를 떳떳하게 받아들인다. 5번 레인은 무너져 머무르는 자리가 아니라 다시 일어나 나아갈 발판이 되며, 1등의 서사가 넘치는 세상에서 2등의 자리를 성장의 좌표로 새긴 책은 결과 지상주의 사회의 대한민국 어린이들에게 건네는 선물이라는 심사 평을 인용한다.

[발췌한 책 속 문장]

38p 나루도 알고 있다. 수영은 무엇보다 집중력이 중요한 종목이다. 환상의 호흡을 보여 줄 팀원도 없고, 신체 조건을 보완해 줄 현란한 기술도 없다. 믿을 구석이라고는 오로지 나 자신과 물뿐이다. 그뿐인가, 가끔은 물마저도 내 편이 아닌 날도 있다.
=> 수영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대면의 공간이다.

60p 나루는 가끔 시합장이 마법의 공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법사들이 허공에 지팡이를 흔들어 비밀의 포털을 열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커다란 시합장 문을 열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들어와 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 시합장의 문은 세계관이 바뀌는 경계다. 시합장에선 선수들의 일상이 끝나고 승부의 시간이 시작된다.

61p 뻑뻑하게 사람들로 가득 찬 경영 풀과는 달리, 다이빙 풀 쪽의 관중석은 반도 차지 않았다. 나루는 그 온도 차이에 조금 놀랐다. 시합장 안에 나루가 모르는 또 다른 세상이 하나 더 있었다.
=> 어린이의 눈에서 본, 비인기 종목과 인기 종목의 차이. 그러기에 더 가슴이 아파진다.

67p “입수가 기가 막히게 잘되면 딱 이런 느낌이거든. 수백 개의 공기 방울이 얇은 이불처럼 내 몸을 감싸 줘. 오늘 마지막에 딱 그랬어.”
=> 다이빙으로 전향한 나루의 언니, 버들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문장.

87p 대회 시작 전, 태양이는 레인 끝 결승점에 자신이 꼭 열어야 할 문이 있다고 생각했다. 뒤로 몇 개의 문이 더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우승한 그 순간만큼은 첫 번째 문을 통과했다는 기쁨에 가슴이 벅찼다.
=> 생이 다할 때까지 인간은 수많은 결승점을 통과해야 한다. 남은 문의 개수를 모른다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계속 헤엄칠 이유가 된다.

91p 대회에서 본 수영부 아이들은 달랐다. 분명히 그 순간 같은 장소에 함께 있었지만,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었다. 감싸고 있는 공기가 달랐고, 스타트대 위에서의 긴장감이 달랐고, 터치패드를 찍고 나서의 간절함도 달랐다.
=> 태양은 수영부 아이들의 삶과 수영에 대한 마음가짐이 공기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음을 느낀다. 그가 잠시 잃어버린 간절함을 타인들의 공기에서 재발견한다.

97p 마음에 두 가지를 담고 있다고 해서 꼭 하나의 크기가 100중의 50인 것은 아니다.
=> 마음에 둘 다 100을 추구하는 건 불가능이 아니다. 마음은 제로섬으로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112p 하지만 수영은 0.01초의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일이 허다하다. 물 밖의 1초와 물속의 1초는 그 무게가 천지 차이이다.
=> 육상 선수에게도 물 밖의 1초와 물 안의 1초를 다르게 느낄 수 있는 일. 시간의 가치는 의미 부여의 크기에 비례한다.

118p 제대로 된 자세가 몸에 배기 위해서는 수많은 반복이 필요하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도 움직일 수 있어야 시합에 나가도 그대로 할 수 있다.
=> 훈련이 무조건 성공은 보장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저점을 방어할 확률은 성공보단 훨씬 높다.

126p 나루의 핸드폰에 비밀 채팅방 초대 알림이 떴다. 태양이었다. 그 순간, 나루의 마음에 진도 3 정도의 지진이 일었다. 느낄 수 있지만 아직 피해는 없다.
=> 감정을 재난의 언어로 표현하되, 그 재난을 기다려지게 만드는 역설이 공존한다. 마음의 두근거림을 진도로 표현한 귀여운 문장.

164p 소문이란 전자레인지에 들어간 팝콘처럼 조금의 열만 가해져도 기다렸다는 듯이 부풀려지는 법이다.
=> 천리를 가는 발 없는 말과, 열만 가해졌을 뿐인데 부피가 급격히 커지는 팝콘 옥수수.

175p 운동이라는 게 그랬다. 인내는 지긋지긋하게 쓰고 열매는 짜릿하게 달다. 나루는 그 달콤함에 취해서 아무리 쓴 인내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쓰디쓴 인내의 끝에 열매가 없다면? 그래도 운동을 계속해야 할까?
=> 전 세계 엘리트 선수들이 매일 지닌 고민.

190p 다이빙대에 오른 이상, 누군가 밀쳐 떨어지기보다는 스스로 뛰어내려야 한다.
=> 결정에는 자신의 비율이 0%일 수 없다.

209p 다시 부끄럽지 않게 물 앞에 서기 위해서는, 잘못을 바로잡아야 했다.
=> 나루는 떳떳함은 기억을 지워서가 아니라 잘못을 갚아서 회복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211p 어쩌면 친구들은 이해해 줄지 모른다고 기대를 품었지만 역시 아닌 건 아닌 거다.
=> 잘못을 세탁해 주는 관계는 편하지만, 사람을 썩게 한다. 아닌 걸 아니라 해주는 관계는 아프지만 사람을 자라게 한다. 반성할 수 있게 하는 친구가 진퉁.

221p 마음에 돌덩이를 안고 있느니 등에 돌덩이를 업고 뛰는 편이 훨씬 후련했다.
=> 여러 불행한 일에도 인간이 선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의 기반엔, 인간의 양심이 본성이라는 데에 있다.

224p 나루는 이날 초희를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의 경기야말로, 어떻게 졌는지가 중요한 시합이었다. 그런 시합이 있다는 걸 이제는 나루도 알았다.
=> 작가는 마지막까지 나루에게 우승을 주지 않는다. 화해했으니, 성장했으니 1등으로 보상하는 관성적 결말을 거부하며 '어떻게 졌는가'를 최종 시험으로 삼았다.

226p 결과가 좋든 나쁘든, 나루 손으로, 나루의 두 팔과 다리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승리의 기쁨도 패배의 분함도 떳떳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승패를 떳떳하게 받아들이려면 결과가 온전히 내 것이어야 한다.

233p 작가는 아이들이 세계와 싸우며 거대한 모험을 하는 이야기 대신 저마다의 빛과 그림자를 통과하며 자신의 터치패드에 정정당당하게 도달하는 이야기를 선택했다. 이토록 현실적이며 촘촘한 시선이 이 작품을 반짝거리게 한다.
=> 열세 살의 유소년에게는 라이벌에게 지는 것, 잘못을 고백하는 것, 좋아하는 아이에게 답장하는 것도 거대한 모험일 수 있다.

234p 어릴 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한 존재가 어른이 되어서 갑자기 그것과 직면할 힘을 얻게 될 리 없다.
=> 성공한 엘리트 중에서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들여다본 과정을 거친 어른들은 얼마나 있을까? 글을 적는 나도 진정으로 성찰을 한 적이 있을까? 이 책을 통해 어른이라고 동화 읽기를 가려선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어릴 적 건너뛴 성찰을 5번 레인의 보충 수영 훈련으로 학습하려 한다. 늦었을지라도, 늦지 않았다는 최면을 하면서.

5번 레인

은소홀 지음
문학동네 펴냄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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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 코멘트]

# 많은 걸 내비치지만, 많은 걸 감추는 수영장
어디서나 있을 법한 수영장 내 여러 인간 군상을 그려낸 작품. 물안경 너머로만 서로를 훔쳐보는, 반쯤 벗은 채로도 철저히 익명인 현대 도시의 축소판인 수영장.

# 여주인공의 물속 몸짓은 무슨 의미였을까
물속에서 여자는 남주인공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책 마지막에도 여자의 동작을 그린 부분을 따로 배정한 거면 분명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쓴 작가가 여자의 말은 자신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평생 비밀로 간직할 것이라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저자가 남긴 한 인터뷰를 통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미국 밴드 케이크(Cake)의 노래 「World of Two」를 부르는 모습이라고 밝힌 바 있다. 「World of Two」는 두 사람이 바깥세상과 분리된 자신들만의 작은 세계를 이룬다는, 쓸쓸함을 자아내는 노래다. 그 노래의 제목이 곧 그녀가 물속에서 건넨 노랫말 없는 몸짓의 방향을 추측해 본다.

[발췌한 책 속 문장]

75p
“간단히 말하면, 호흡, 다리, 팔을 동시에 잘 움직여야 해. 우선 팔부터, 물속에서 중심을 잘 잡은 상태에서 팔꿈치와 어깨를 높이 들어. 그러고선 반대쪽 손을 허벅지까지 쭉 밀어내. 밀어낸 손을 다시 원위치로 가져오는데, 팔꿈치를 높이 들어야 돼. 손이 겨드랑이에 닿을 듯한 느낌으로, 그리고 다리는 계속 물장구 쳐야 돼. 절대로 멈추면 안 돼. 자기 리듬을 찾아야 돼. 두 박자든, 세 박자든, 다섯 박자든 상관없어. 너 다리는 잘하잖아.”
=> 대화가 거의 없는 책에서 가장 긴 대사는 여주인공의 기술 설명이었다.

“마지막으로 호흡인데, 너만의 리듬을 찾아야 돼. 물속에서는 천천히 숨을 내쉬어. 그러지 않으면 금방 진이 빠지거든.”
=> 인생을 산 지 몇십 년 만에 자유형 동작 설명을, 책을 통해 접했다.

염소의 맛

바스티앙 비베스 지음
미메시스 펴냄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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