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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상태: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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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밀란 쿤데라 지음
민음사 펴냄

농담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 제목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였다. 농담이라니, 이렇게 가벼운 제목을 달고 있는데 정작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무너뜨리는 얘기였다.

주인공 루드빅은 대학 시절 공산당 학생연맹에서 촉망받던 청년이었다. 여자친구 마르케타가 훈련학교에 가서 자기를 별로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같아 서운했던 루드빅은, 장난삼아 엽서에 이렇게 적어 보낸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진지하게 혁명에만 몰두하는 여자친구를 살짝 놀려주고 싶어서 던진, 그야말로 아무 뜻도 없는 농담이었다. 근데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암살할 정도로 적대시하던 시대였고, 이 엽서 한 장이 결국 반동분자의 증거로 몰려서 루드빅은 공산당에서 제명되고 학교에서도 쫓겨난다. 군대에 끌려가 탄광에서 강제노역까지 하게 된다. 여자친구한테 좀 짓궂게 굴어보려던 그 마음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꺾어버린 거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계속 소름이 끼쳤던 건, 루드빅이 벌을 받을 만한 짓을 저지른 게 전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그저 조금 재치 있고, 조금 냉소적인 성격을 가진 청년이었을 뿐이다. 근데 그 시대는 웃음이나 아이러니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오직 혁명을 향한 금욕적이고 진지한 태도만이 허락되는 분위기 속에서, 농담을 즐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루드빅을 무너뜨린 건 그의 잘못이 아니라, 애초에 개인의 유머 감각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그 시대의 잔인함이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처벌받은 게 루드빅의 어떤 죄가 아니라, 그저 그가 가진 인간적인 기질 그 자체였다는 게 서서히 드러난다.

그리고 소설 전체에 흐르는 정서가 또 흥미로웠는데, 쿤데라는 이걸 필연적인 역사의 비극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모든 게 그냥 우연히, 어쩌다 보니 그렇게 흘러간 일처럼 그려진다. 농담 한마디가 인생을 망가뜨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복수와 화해의 시도마저도 결국 뜻대로 되지 않고 다시 허무하게 어긋난다. 루드빅은 훗날 자기를 몰락시킨 동료의 아내를 유혹해서 복수하려 하지만, 그마저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씁쓸하게 끝나버린다. 역사도, 개인의 복수도, 결국 우연과 어긋남의 연속일 뿐이라는 이 허무함이 소설 내내 깔려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말 한마디의 무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나도 가볍게 던진 말이 의도치 않게 누군가한테 상처가 되거나, 예상 못 한 방식으로 오해를 낳았던 경험이 있다. 물론 루드빅처럼 인생 전체가 무너지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별생각 없이 뱉은 말이 어떤 맥락에서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실감했던 순간들이 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그런 경험들이 다시 떠올랐다. 결국 우리는 각자 자기가 처한 시대와 상황이라는 틀 안에서 말을 하고 살아가는데, 그 틀이 얼마나 폭력적이냐에 따라 똑같은 농담 하나가 그냥 웃어넘길 일이 될 수도,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사건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지금 내가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농담들이 얼마나 안전한 세상 안에 있는 건지, 새삼 감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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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상태:카뮈)

@smlee682

오만과 편견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줄거리보다 제목 그 자체 때문이었다.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소설 안에 이 문장이 그대로 나오는 건 아니지만, 다아시의 오만이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동시에 엘리자베스의 편견이 그녀 스스로 다아시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이 소설의 구조를 이보다 정확하게 요약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사랑을 가로막는 게 상대방이 아니라 언제나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계속 따라다녔다.

엘리자베스가 다아시를 처음 오만한 사람으로 단정 짓게 된 건 무도회에서 우연히 엿들은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다아시가 이후에 뭘 하든 그 첫인상이라는 필터를 통해서만 그를 읽는다. 나는 이 부분이 제일 무서웠다. 엘리자베스는 결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소설 안에서 가장 눈치 빠르고 재치 있는 사람으로 그려지는데, 그런 사람조차 한번 굳어진 인상 앞에서는 판단력이 무뎌진다. 그러니 편견이라는 게 어리숙한 사람만 걸리는 함정이 아니라, 오히려 똑똑한 사람일수록 더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판단력을 믿는 사람일수록 그 판단이 틀렸을 가능성을 의심하는 데 인색해지니까.

이 지점에서 나도 비슷한 경험이 떠올랐다. 누군가에 대해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나면, 그 판단이 맞았다는 걸 확인해주는 정보만 자꾸 눈에 들어오고, 그 판단과 어긋나는 모습은 그냥 예외겠거니 하고 넘겨버리게 된다. 스스로 관찰력이 좋다고 믿을수록 오히려 그 첫인상을 더 강하게 확신해버리는 역설이 있는데, 그 확신이 결국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가려버리는 거 같다.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사람을 잘 읽는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그 자부심이 오히려 다아시라는 사람의 본질을 제대로 보는 걸 막아섰다. 편견이 무서운 건 사람을 아예 못 보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어느 한 단면만 계속 확대해서 보여주고 나머지는 슬그머니 지워버린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지워진 자리에 남는 건 결국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이미 정해놓고 있던 상이었다. 결국 통찰력이라는 게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편견을 더 정교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해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이 인물을 통해서 알게 됐다.

다아시의 첫 번째 청혼 장면도 인상 깊었다.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그는 상대 집안의 낮은 신분과 천박한 인맥을 굳이 언급하며, 자기가 이 청혼을 하기까지 얼마나 큰 결심이 필요했는지를 강조한다. 사랑 고백이라는 게 원래 상대를 높이는 말이어야 할 텐데, 여기서는 오히려 상대를 낮추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그 아이러니 안에 다아시라는 사람의 오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당연히 그 청혼을 거절하면서, 그동안 쌓아뒀던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쏟아낸다. 다아시가 언니 제인과 빙리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것, 위컴이라는 남자에게 부당하게 굴었다는 소문까지 근거 삼아 그를 몰아붙인다. 다아시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비난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반박하는 대신, 다음 날 편지 한 장을 남긴다. 그 편지에는 위컴이 사실 자기 여동생을 유혹하려 했던 인물이라는 것, 빙리와 제인 사이를 갈라놓은 데도 진심 어린 오해가 있었다는 사실이 조목조목 담겨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성급하게, 얼마나 자기 확신에 차서 그를 판단해왔는지를 그제야 깨닫는다.

이 소설이 유독 좋았던 건, 그 변화가 엘리자베스 혼자만의 몫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편견을 걷어내는 동안, 다아시 역시 자기 오만을 조용히 내려놓고 있었다. 그는 리디아 사건을 뒤에서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해결해주고, 나중에는 첫 청혼에서 보였던 무례함과 허영심을 직접 사과한다. 한 명이 변하고 한 명은 그저 그걸 지켜보는 게 아니라, 둘 다 같은 시간 위에서 각자 자기 안의 걸림돌을 걷어내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오만과 편견이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내려진 뒤에야, 두 사람 사이에 비로소 사랑이라는 게 들어설 자리가 생겼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살면서 누군가에 대한 첫인상 하나로 오래도록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던 순간들을 떠올려봤다. 한 번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나면, 그 이후로는 아무리 다른 모습을 보여줘도 예전의 그 인상 안에서만 상대를 해석하게 된다. 엘리자베스처럼 통찰력 있는 사람도 그 함정에서 벗어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게, 오히려 나한테는 위안이 됐다. 편견을 갖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그걸 붙잡고 있다가도 다시 들여다보고 고쳐나가는 태도가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

다아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진짜로 달라진 건 더 좋은 조건을 갖춰서가 아니라, 자기 안의 오만을 스스로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을 더 내세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 했을 때, 비로소 그 사랑이 가능해졌다. 결국 이 소설의 제목이 말하는 그대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게 막는 건 대개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쥐고 있는 그 오만과 편견이었다.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민음사 펴냄

3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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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상태:카뮈)

@smlee682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시작부터 특이했다. 프롤로그도 인사말도 없이,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곧장 니체의 영원회귀 얘기가 나온다. 모든 순간이 죽고 나서도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무거워지는지, 반대로 인생이 딱 한 번뿐이라면 그건 또 얼마나 가벼워지는지를 먼저 던져놓고 시작하는 거다. 소설을 읽기도 전에 이미 이 질문 앞에 세워지는 느낌이었다.

소설은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네 사람의 이야기를 엮어간다. 육체와 사랑을 별개로 여기며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외과의 토마시, 그런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 가벼움 때문에 매일 괴로워하는 테레자. 조국을 잃은 예술가라는 꼬리표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화가 사비나, 그런 사비나에게 매혹된 안정된 가장 프란츠.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던 건, 쿤데라가 이 네 사람을 통해 결국 묻고 싶었던 게 무게와 가벼움 중 어느 쪽이 진짜 삶에 더 가까운가 하는 질문이었다는 거다.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 물음이 소설 초반에 나오는데, 처음엔 그냥 철학적인 질문 정도로 읽었다. 근데 토마시와 테레자를 지켜보면서 이 질문이 얼마나 절박한 건지 알게 됐다. 토마시는 아무런 짐도 지지 않은 채 가볍게 살아가려 하지만, 그 가벼움 때문에 자기 존재가 점점 반쯤만 현실적인 것으로 흩어진다. 반대로 테레자는 무거움을 짊어지고서라도 사랑을, 삶을 진짜로 느끼고 싶어 한다. 근데 그 무게가 그녀를 짓누르는 고통이 되기도 한다. 결국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사는 건데, 어느 쪽도 완전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 소설의 냉정한 지점이었다.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이 문장 뒤에 토마시가 되뇌는 독일 속담이 나온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구절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늘 지금의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두려워하면서 신중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근데 정작 우리 삶에는 연습이라는 게 없다. 이번 생이 처음이자 마지막 본편이고, 그러니 우리가 매번 내리는 선택은 다시 고쳐 쓸 수 없는 최종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삶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어야 한다. 근데 저 속담은 정반대로 말한다. 한 번뿐이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 무게도 갖지 못한다고. 비교할 다른 삶이 없으니, 이 선택이 옳았는지 그른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는 거다.

처음엔 이 두 생각이 서로 부딪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고쳐 쓸 수 없다는 사실이 무게를 만드는 동시에,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사실이 그 무게를 다시 지워버리는 거니까. 근데 계속 곱씹다 보니 이 둘이 서로 다른 얘기가 아니라, 우리 삶이 단 한 번뿐이라는 같은 사실을 각자 다른 방향에서 보고 있을 뿐이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건 그 사실을 앞에서 본 거고, 비교할 수 없다는 건 뒤에서 본 거였다. 결국 하나의 사실이 보는 각도에 따라 무게로도, 가벼움으로도 다르게 읽히는 거였던 거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삶의 무게라는 게 애초에 삶 자체에 붙어 있는 속성이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우리 시선에 달려 있다는 거였다. 같은 선택, 같은 하루를 두고도 어떤 날은 다시는 안 올 소중한 순간처럼 무겁게 느껴지고, 어떤 날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먼지처럼 가볍게 흩어진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게 사건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 순간에 얼마나 시선을 두느냐라는 걸, 이 소설을 읽고 나서야 제대로 실감했다. 그러니 삶이 무겁냐 가볍냐를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살려고 애쓰기보다, 지금 내가 이 순간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를 자주 돌아보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싶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살면서 내렸던 선택들을 다시 떠올려봤다. 어떤 선택 앞에서는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끝까지 알 수 없다는 게 늘 불안했다. 근데 생각해보면 애초에 비교할 대상 자체가 없었다. 그 선택을 하지 않았을 때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 지금 이 선택이 옳았는지는 사실 영원히 증명할 방법이 없는 거였다. 처음엔 이게 허무하게 느껴졌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정답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매번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를 끝없이 검증하려던 그 강박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토마시처럼 아무 무게도 없이 가볍게 흘러가는 삶도, 테레자처럼 모든 걸 무겁게 짊어지는 삶도 다 나름의 방식으로 진실했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삶인지는 소설이 끝나도록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엔 이 소설이 나한테 아무 결론도 안 주는 것 같아 답답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오히려 정직한 태도였던 것 같다. 애초에 하나의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결국 중요한 건 무거움과 가벼움 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지금 택하고 있는 삶의 무게를 얼마나 정직하게 짊어지고 살아가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살기로 했으면 그 가벼움을 끝까지 회피 없이 마주하고, 무겁게 살기로 했으면 그 무게 앞에서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 답을 찾는 대신, 나는 대신 이 철학 하나를 오래 품고 살아가게 될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민음사 펴냄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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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상태:카뮈)

@smlee682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사진을 처음 봤을 때는 사실 별거 없어 보였다. 그냥 까만 배경에 희미한 점 하나. 그런데 이게 1990년,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기 직전 60억 킬로미터 밖에서 뒤를 돌아 찍은 지구 사진이라는 걸 알고 나서 다시 보니까, 그 별거 없어 보이던 점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지구가 겨우 0.12화소, 그러니까 사진 전체에서 먼지 한 톨보다도 작은 크기로 찍혀 있었다.

세이건이 이 사진을 굳이 찍자고 밀어붙인 이유가 인상적이었다. 처음엔 과학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는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카메라를 돌리는 것 자체가 태양빛 때문에 렌즈에 손상을 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근데 세이건은 그럼에도 이 사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주 속에서 인류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거였다. 그 판단이 지금 보면 정말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진 한 장이 그 어떤 논문이나 통계보다도 더 강력하게 인간의 위치를 실감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 점 하나가 우리한테는 전부라는 사실도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우주 전체로 보면 먼지만도 못한 크기지만, 우리한테는 갈 곳도 대안도 없는 유일한 자리인 거다. 이 두 가지를 같이 놓고 보니까 단순히 허무하다는 감정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게 이거 하나뿐이라는 걸 실감하고 나니, 오히려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고 함부로 대했던 것들, 서로한테 쏟았던 다툼이나 무심함 같은 게 새삼 아깝게 느껴졌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요즘 내가 매달리고 있는 크고 작은 걱정들을 다시 떠올려봤다. 누군가와의 갈등, 잘 안 풀리는 일들,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은 불안. 이런 것들이 실제로는 이 우주적 스케일에서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크기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정작 그 순간엔 세상에서 제일 큰일처럼 느껴진다. 한숨도 안 자고 밤새 뒤척이게 만드는 일들이 사실은 저 먼지 한 톨 위, 그 안에서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한 점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새삼 우습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이럴수록 가끔은 이렇게 시야를 크게 확대해서 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의 걱정에 파묻혀 있다가도, 이 창백한 푸른 점 위에서 다들 비슷한 크기의 걱정을 안고 각자의 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는 걸 떠올리면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내 고민이 별거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나만큼이나 절박하게 뭔가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되는 거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동시에, 이 작은 점 위에서 우리가 왜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해야 하는지도 더 선명하게 만들어줬다. 우리가 가진 게 결국 이 점 하나뿐이고, 그 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다 나처럼 작고 연약한 존재라면, 서로한테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 것 말고 달리 뭘 더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다 같이 이 먼지 한 톨 위에 잠깐 머물다 가는 거라면, 그 잠깐의 시간을 서로 할퀴며 보낼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창백한 푸른 점

칼 세이건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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