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줄거리보다 제목 그 자체 때문이었다.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소설 안에 이 문장이 그대로 나오는 건 아니지만, 다아시의 오만이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동시에 엘리자베스의 편견이 그녀 스스로 다아시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이 소설의 구조를 이보다 정확하게 요약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사랑을 가로막는 게 상대방이 아니라 언제나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계속 따라다녔다.
엘리자베스가 다아시를 처음 오만한 사람으로 단정 짓게 된 건 무도회에서 우연히 엿들은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다아시가 이후에 뭘 하든 그 첫인상이라는 필터를 통해서만 그를 읽는다. 나는 이 부분이 제일 무서웠다. 엘리자베스는 결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소설 안에서 가장 눈치 빠르고 재치 있는 사람으로 그려지는데, 그런 사람조차 한번 굳어진 인상 앞에서는 판단력이 무뎌진다. 그러니 편견이라는 게 어리숙한 사람만 걸리는 함정이 아니라, 오히려 똑똑한 사람일수록 더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판단력을 믿는 사람일수록 그 판단이 틀렸을 가능성을 의심하는 데 인색해지니까.
이 지점에서 나도 비슷한 경험이 떠올랐다. 누군가에 대해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나면, 그 판단이 맞았다는 걸 확인해주는 정보만 자꾸 눈에 들어오고, 그 판단과 어긋나는 모습은 그냥 예외겠거니 하고 넘겨버리게 된다. 스스로 관찰력이 좋다고 믿을수록 오히려 그 첫인상을 더 강하게 확신해버리는 역설이 있는데, 그 확신이 결국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가려버리는 거 같다.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사람을 잘 읽는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그 자부심이 오히려 다아시라는 사람의 본질을 제대로 보는 걸 막아섰다. 편견이 무서운 건 사람을 아예 못 보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어느 한 단면만 계속 확대해서 보여주고 나머지는 슬그머니 지워버린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지워진 자리에 남는 건 결국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이미 정해놓고 있던 상이었다. 결국 통찰력이라는 게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편견을 더 정교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해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이 인물을 통해서 알게 됐다.
다아시의 첫 번째 청혼 장면도 인상 깊었다.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그는 상대 집안의 낮은 신분과 천박한 인맥을 굳이 언급하며, 자기가 이 청혼을 하기까지 얼마나 큰 결심이 필요했는지를 강조한다. 사랑 고백이라는 게 원래 상대를 높이는 말이어야 할 텐데, 여기서는 오히려 상대를 낮추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그 아이러니 안에 다아시라는 사람의 오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당연히 그 청혼을 거절하면서, 그동안 쌓아뒀던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쏟아낸다. 다아시가 언니 제인과 빙리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것, 위컴이라는 남자에게 부당하게 굴었다는 소문까지 근거 삼아 그를 몰아붙인다. 다아시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비난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반박하는 대신, 다음 날 편지 한 장을 남긴다. 그 편지에는 위컴이 사실 자기 여동생을 유혹하려 했던 인물이라는 것, 빙리와 제인 사이를 갈라놓은 데도 진심 어린 오해가 있었다는 사실이 조목조목 담겨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성급하게, 얼마나 자기 확신에 차서 그를 판단해왔는지를 그제야 깨닫는다.
이 소설이 유독 좋았던 건, 그 변화가 엘리자베스 혼자만의 몫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편견을 걷어내는 동안, 다아시 역시 자기 오만을 조용히 내려놓고 있었다. 그는 리디아 사건을 뒤에서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해결해주고, 나중에는 첫 청혼에서 보였던 무례함과 허영심을 직접 사과한다. 한 명이 변하고 한 명은 그저 그걸 지켜보는 게 아니라, 둘 다 같은 시간 위에서 각자 자기 안의 걸림돌을 걷어내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오만과 편견이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내려진 뒤에야, 두 사람 사이에 비로소 사랑이라는 게 들어설 자리가 생겼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살면서 누군가에 대한 첫인상 하나로 오래도록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던 순간들을 떠올려봤다. 한 번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나면, 그 이후로는 아무리 다른 모습을 보여줘도 예전의 그 인상 안에서만 상대를 해석하게 된다. 엘리자베스처럼 통찰력 있는 사람도 그 함정에서 벗어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게, 오히려 나한테는 위안이 됐다. 편견을 갖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그걸 붙잡고 있다가도 다시 들여다보고 고쳐나가는 태도가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
다아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진짜로 달라진 건 더 좋은 조건을 갖춰서가 아니라, 자기 안의 오만을 스스로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을 더 내세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 했을 때, 비로소 그 사랑이 가능해졌다. 결국 이 소설의 제목이 말하는 그대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게 막는 건 대개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쥐고 있는 그 오만과 편견이었다.
2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시작부터 특이했다. 프롤로그도 인사말도 없이,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곧장 니체의 영원회귀 얘기가 나온다. 모든 순간이 죽고 나서도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무거워지는지, 반대로 인생이 딱 한 번뿐이라면 그건 또 얼마나 가벼워지는지를 먼저 던져놓고 시작하는 거다. 소설을 읽기도 전에 이미 이 질문 앞에 세워지는 느낌이었다.
소설은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네 사람의 이야기를 엮어간다. 육체와 사랑을 별개로 여기며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외과의 토마시, 그런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 가벼움 때문에 매일 괴로워하는 테레자. 조국을 잃은 예술가라는 꼬리표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화가 사비나, 그런 사비나에게 매혹된 안정된 가장 프란츠.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던 건, 쿤데라가 이 네 사람을 통해 결국 묻고 싶었던 게 무게와 가벼움 중 어느 쪽이 진짜 삶에 더 가까운가 하는 질문이었다는 거다.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 물음이 소설 초반에 나오는데, 처음엔 그냥 철학적인 질문 정도로 읽었다. 근데 토마시와 테레자를 지켜보면서 이 질문이 얼마나 절박한 건지 알게 됐다. 토마시는 아무런 짐도 지지 않은 채 가볍게 살아가려 하지만, 그 가벼움 때문에 자기 존재가 점점 반쯤만 현실적인 것으로 흩어진다. 반대로 테레자는 무거움을 짊어지고서라도 사랑을, 삶을 진짜로 느끼고 싶어 한다. 근데 그 무게가 그녀를 짓누르는 고통이 되기도 한다. 결국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사는 건데, 어느 쪽도 완전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 소설의 냉정한 지점이었다.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이 문장 뒤에 토마시가 되뇌는 독일 속담이 나온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구절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늘 지금의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두려워하면서 신중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근데 정작 우리 삶에는 연습이라는 게 없다. 이번 생이 처음이자 마지막 본편이고, 그러니 우리가 매번 내리는 선택은 다시 고쳐 쓸 수 없는 최종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삶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어야 한다. 근데 저 속담은 정반대로 말한다. 한 번뿐이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 무게도 갖지 못한다고. 비교할 다른 삶이 없으니, 이 선택이 옳았는지 그른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는 거다.
처음엔 이 두 생각이 서로 부딪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고쳐 쓸 수 없다는 사실이 무게를 만드는 동시에,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사실이 그 무게를 다시 지워버리는 거니까. 근데 계속 곱씹다 보니 이 둘이 서로 다른 얘기가 아니라, 우리 삶이 단 한 번뿐이라는 같은 사실을 각자 다른 방향에서 보고 있을 뿐이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건 그 사실을 앞에서 본 거고, 비교할 수 없다는 건 뒤에서 본 거였다. 결국 하나의 사실이 보는 각도에 따라 무게로도, 가벼움으로도 다르게 읽히는 거였던 거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삶의 무게라는 게 애초에 삶 자체에 붙어 있는 속성이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우리 시선에 달려 있다는 거였다. 같은 선택, 같은 하루를 두고도 어떤 날은 다시는 안 올 소중한 순간처럼 무겁게 느껴지고, 어떤 날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먼지처럼 가볍게 흩어진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게 사건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 순간에 얼마나 시선을 두느냐라는 걸, 이 소설을 읽고 나서야 제대로 실감했다. 그러니 삶이 무겁냐 가볍냐를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살려고 애쓰기보다, 지금 내가 이 순간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를 자주 돌아보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싶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살면서 내렸던 선택들을 다시 떠올려봤다. 어떤 선택 앞에서는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끝까지 알 수 없다는 게 늘 불안했다. 근데 생각해보면 애초에 비교할 대상 자체가 없었다. 그 선택을 하지 않았을 때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 지금 이 선택이 옳았는지는 사실 영원히 증명할 방법이 없는 거였다. 처음엔 이게 허무하게 느껴졌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정답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매번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를 끝없이 검증하려던 그 강박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토마시처럼 아무 무게도 없이 가볍게 흘러가는 삶도, 테레자처럼 모든 걸 무겁게 짊어지는 삶도 다 나름의 방식으로 진실했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삶인지는 소설이 끝나도록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엔 이 소설이 나한테 아무 결론도 안 주는 것 같아 답답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오히려 정직한 태도였던 것 같다. 애초에 하나의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결국 중요한 건 무거움과 가벼움 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지금 택하고 있는 삶의 무게를 얼마나 정직하게 짊어지고 살아가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살기로 했으면 그 가벼움을 끝까지 회피 없이 마주하고, 무겁게 살기로 했으면 그 무게 앞에서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 답을 찾는 대신, 나는 대신 이 철학 하나를 오래 품고 살아가게 될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민음사 펴냄
2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사진을 처음 봤을 때는 사실 별거 없어 보였다. 그냥 까만 배경에 희미한 점 하나. 그런데 이게 1990년,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기 직전 60억 킬로미터 밖에서 뒤를 돌아 찍은 지구 사진이라는 걸 알고 나서 다시 보니까, 그 별거 없어 보이던 점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지구가 겨우 0.12화소, 그러니까 사진 전체에서 먼지 한 톨보다도 작은 크기로 찍혀 있었다.
세이건이 이 사진을 굳이 찍자고 밀어붙인 이유가 인상적이었다. 처음엔 과학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는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카메라를 돌리는 것 자체가 태양빛 때문에 렌즈에 손상을 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근데 세이건은 그럼에도 이 사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주 속에서 인류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거였다. 그 판단이 지금 보면 정말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진 한 장이 그 어떤 논문이나 통계보다도 더 강력하게 인간의 위치를 실감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 점 하나가 우리한테는 전부라는 사실도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우주 전체로 보면 먼지만도 못한 크기지만, 우리한테는 갈 곳도 대안도 없는 유일한 자리인 거다. 이 두 가지를 같이 놓고 보니까 단순히 허무하다는 감정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게 이거 하나뿐이라는 걸 실감하고 나니, 오히려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고 함부로 대했던 것들, 서로한테 쏟았던 다툼이나 무심함 같은 게 새삼 아깝게 느껴졌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요즘 내가 매달리고 있는 크고 작은 걱정들을 다시 떠올려봤다. 누군가와의 갈등, 잘 안 풀리는 일들,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은 불안. 이런 것들이 실제로는 이 우주적 스케일에서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크기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정작 그 순간엔 세상에서 제일 큰일처럼 느껴진다. 한숨도 안 자고 밤새 뒤척이게 만드는 일들이 사실은 저 먼지 한 톨 위, 그 안에서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한 점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새삼 우습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이럴수록 가끔은 이렇게 시야를 크게 확대해서 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의 걱정에 파묻혀 있다가도, 이 창백한 푸른 점 위에서 다들 비슷한 크기의 걱정을 안고 각자의 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는 걸 떠올리면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내 고민이 별거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나만큼이나 절박하게 뭔가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되는 거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동시에, 이 작은 점 위에서 우리가 왜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해야 하는지도 더 선명하게 만들어줬다. 우리가 가진 게 결국 이 점 하나뿐이고, 그 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다 나처럼 작고 연약한 존재라면, 서로한테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 것 말고 달리 뭘 더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다 같이 이 먼지 한 톨 위에 잠깐 머물다 가는 거라면, 그 잠깐의 시간을 서로 할퀴며 보낼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창백한 푸른 점
칼 세이건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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