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시몬이 교회 옆에 쓰러져 있던 미하엘을 발견하면서 시작됩니다. 가난한 구두장이 시몬은 처음에는 낯선 미하엘을 외면하려 하지만, 결국 그를 지나치지 못하고 자신의 옷을 벗어준 뒤 집으로 데려옵니다. 아내 마트료나 역시 처음에는 화를 내지만 곧 마음을 열고 미하엘에게 음식과 옷을 내어줍니다. 그 모습을 본 미하엘은 처음으로 미소를 짓습니다.
이후 미하엘은 시몬에게 구두 만드는 법을 배우며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어느 날 한 부유한 신사가 찾아와 오래 신을 수 있는 튼튼한 장화를 주문합니다. 하지만 미하엘은 장화 대신 장례용 슬리퍼를 만듭니다. 시몬은 당황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사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신사의 하인은 장화 대신 장례용 슬리퍼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미하엘은 이미 완성해 둔 슬리퍼를 건넵니다. 이때 미하엘은 두 번째 미소를 짓습니다.
그로부터 6년 뒤, 한 여인이 두 소녀를 데리고 구두를 맞추러 찾아옵니다. 여인은 두 아이의 친어머니가 아니었지만,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친딸처럼 사랑하며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미하엘은 세 번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사실 그는 하느님의 명을 받고 인간 세상에 내려온 천사였습니다. 그는 과거 두 소녀의 친어머니의 영혼을 거두라는 명을 받았지만, 어린아이들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불쌍히 여겨 명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이에 하느님은 미하엘에게 인간 세상에서 세 가지 진리를 깨달은 뒤에야 하늘로 돌아올 수 있다고 명합니다. 그 세 가지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습니다.
미하엘이 찾은 답은 무엇이었을까요? 서평에서 함께 살펴보시죠.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37405068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민음사 펴냄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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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는 좋게 말하면 철학 에세이에 가깝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계발서인 척하는 철학서에 가깝습니다. 많은 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삶의 조언을 주는 책을 기대하고 읽으시겠지만, 실제 내용은 자본주의 비판, 종교, 사회 전체의 변화 같은 훨씬 큰 철학적 담론을 다룹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을 완전히 철학서로 읽으려고 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철학서라면 ‘소유’와 ‘존재’라는 핵심 개념이 어디까지 구분될 수 있는지, 그 구분이 반례 앞에서도 유지되는지, 앞선 철학적 논의들과 어떻게 충돌하거나 이어지는지까지 꽤 엄밀하게 다뤄야 합니다. 그런데 《소유냐 존재냐》는 이런 개념들을 치밀하게 따져 나가기보다는, 소유와 존재를 삶의 두 방향으로 크게 나누고 그 대비를 통해 독자를 설득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메시지는 분명하지만, 그만큼 단순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또한 순환 논리도 존재합니다. 프롬은 소유 양식에서 벗어나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는 모습마저 하나의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책에 나온 예시를 생각해 봅시다. 내가 수업 전에 미리 공부하고 교수님과 건설적인 대화를 하는 ‘존재 양식적 학생’이 된다고 해도, 결국 나는 “그런 멋진 학생인 나”라는 이미지를 소유하게 됩니다. 기부나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하게 소유를 벗어난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나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자기 만족이나 정체성의 소유가 따라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소유에서 벗어나 존재로 나아간다는 프롬의 구분은 생각보다 깔끔하게 나뉘지 않습니다. 존재하려는 태도조차 결국 또 다른 방식의 소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자기계발서로 읽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철학서로 읽기에는 논리가 성긴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에는 분명한 의의가 있습니다. 세계대전을 겪고, 유럽에서는 “인간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실존주의적 분위기가 강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사르트르의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이나 카뮈의 《이방인》, 사르트르의 《구토》 같은 작품들이 그 시대의 불안과 허무를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런 철학 작품을 직접 읽고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프롬은 당시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조금 더 대중적인 삶의 언어로 바꾸어 제시한 사람입니다. 실존주의가 “인간은 정해진 본질보다 먼저 존재하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을 만들어 간다"라고 말한다면, 프롬은 이를 “무엇을 소유하느냐보다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중요하다"라는 방식으로 풀어낸 것 같습니다. 즉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라는 추상적인 명제를, “존재가 소유에 앞선다"라는 보다 현실적인 삶의 태도로 바꾼 셈입니다.
물론 논리적으로 허술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의 문제를 일반 독자들이 자기 삶에 비추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소유냐 존재냐》는 여전히 의미가 있는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이 책은 완성도 높은 철학서라기보다는, 전후 시대의 불안과 실존주의적 고민을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번역한 책에 가깝습니다.
서평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340784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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