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민(상태:카뮈)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수민(상태:카뮈)

@smlee682

+ 팔로우
[예스리커버] 앵무새 죽이기 (To Kill a Mockingbird)의 표지 이미지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저 외 1명 지음
열린책들 펴냄

앵무새 죽이기는 1930년대 미국 남부, 앨라배마의 작은 마을 메이콤이 배경이다. 화자는 어린 소녀 스카웃인데, 엄마 없이 오빠 젬이랑 변호사 아빠 애티커스, 가사도우미 캘퍼니아랑 같이 산다. 처음엔 그냥 유쾌한 남매의 성장담인 줄 알았다. 옆집 은둔자 부 래들리를 둘러싼 아이들의 상상이랑 장난, 여름날 소소한 모험들이 편안하게 흘러갔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스카웃의 아빠 애티커스가 흑인 청년 톰 로빈슨의 변호를 맡으면서, 소설 공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톰은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선다. 증거를 하나씩 따라가 보면 그가 무죄라는 게 거의 분명했다. 애티커스는 최선을 다해 그 사실을 배심원들 앞에 하나하나 짚어냈고, 재판 내내 배심원들의 표정이 흔들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도 결국 유죄 평결이 내려진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정말 숨이 막혔다. 증거와 논리로는 도저히 뒤집을 수 없을 만큼 진실이 선명했는데, 배심원들은 결국 그 진실이 아니라 자신들이 속한 사회가 이미 정해놓은 답을 골랐다. 흑인이 백인을 상대로 유죄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 마을은 애초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다. 그러니까 이 재판은 처음부터 증거를 다투는 자리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론에 증거를 끼워 맞추는 자리였던 셈이다. 재판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사람들이 확인받고 싶었던 건 진실이 아니라 자기들이 이미 믿고 있던 세계였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일 깊게 생각하게 된 건 역시 제목이었다. 앵무새는 아무 해도 끼치지 않고 그저 노래만 부르는 존재라서, 그런 새를 쏘는 건 죄악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근데 이 말을 곱씹을수록 이게 단순히 새 한 마리 얘기가 아니라는 게 점점 선명해졌다. 부 래들리도, 톰 로빈슨도 결국 이 앵무새였다. 세상이 이상하다고, 위협적이라고 낙인찍은 존재들이 사실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무해했다는 것.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이해 못 하는 존재, 자기랑 다르게 생기거나 낯설게 사는 존재한테 아무렇지 않게 총을 겨눈다. 그 총이 실제 총알이 아니라 소문이고 편견이고 판결이라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고 끔찍했다. 총알로 사람을 쏘면 적어도 재판정에 서고 형벌을 받는다. 누군가는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근데 소문이나 편견으로 한 사람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건 아무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 다들 그냥 말 한마디, 시선 한 번 정도만 보탰을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요즘 직장 내 괴롭힘이 유독 무섭다고들 하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다. 딱히 누구 하나가 결정적으로 큰 폭력을 휘두른 게 아닌데, 다수의 미묘한 배제와 뒷말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한 사람을 완전히 고립시키고 무너뜨린다. 근데 그 과정을 되짚어봐도 누구 하나 이건 내 책임이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총알로 쏘는 살인보다 이런 형태의 폭력이 더 끔찍한 건, 가해가 이렇게 눈에 안 보이게 분산되어 있어서 아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건 소설 속 재판정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고 배제할 때마다 조용히, 아무도 죄책감 없이 반복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 소설은 정의가 항상 이기는 건 아니라는 걸 냉정하게 보여준다. 나도 살면서 옳은 쪽이 늘 이기는 게 아니라는 걸 여러 번 체감했다. 노력한다고,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결과가 늘 그에 맞게 따라오는 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허무해지고, 그냥 적당히 흐름에 맞춰 사는 게 더 편한 게 아닐까 싶은 순간들도 있었다.

근데 애티커스를 보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는 이 재판에서 자기가 이길 거라고 믿지 않았다. 오히려 질 걸 거의 알고 있으면서도 변호를 맡았다. 그러니까 그가 싸운 이유는 승리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그게 옳은 일이었기 때문에, 결과와 상관없이 옳은 자리에 서 있고 싶었던 거다. 처음엔 이게 너무 순진하거나 이상적인 태도처럼 보였다.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오히려 세상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였다. 세상이 늘 정의롭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만이, 결과에 기대지 않고도 옳은 걸 밀고 나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태도는 재판에서는 졌지만 완전히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았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스카웃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진 재판, 마을 사람들의 비난,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태도를 곁에서 지켜본 아이는 그걸 그대로 마음에 새기고 자란다. 결국 이 소설의 진짜 결말은 법정 안이 아니라, 그 법정을 지켜본 다음 세대의 마음속에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당장 결과로 증명되지 않는 옳음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조용히 씨앗처럼 남아서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자라날 수 있다는 걸 다시 믿게 됐다. 그래서 지금 당장 손에 잡히는 결과가 없다고 해서, 옳다고 믿는 걸 계속 밀고 나가는 일이 헛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0

이수민(상태:카뮈)님의 다른 게시물

이수민(상태:카뮈)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수민(상태:카뮈)

@smlee682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시작부터 특이했다. 프롤로그도 인사말도 없이,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곧장 니체의 영원회귀 얘기가 나온다. 모든 순간이 죽고 나서도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무거워지는지, 반대로 인생이 딱 한 번뿐이라면 그건 또 얼마나 가벼워지는지를 먼저 던져놓고 시작하는 거다. 소설을 읽기도 전에 이미 이 질문 앞에 세워지는 느낌이었다.

소설은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네 사람의 이야기를 엮어간다. 육체와 사랑을 별개로 여기며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외과의 토마시, 그런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 가벼움 때문에 매일 괴로워하는 테레자. 조국을 잃은 예술가라는 꼬리표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화가 사비나, 그런 사비나에게 매혹된 안정된 가장 프란츠.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던 건, 쿤데라가 이 네 사람을 통해 결국 묻고 싶었던 게 무게와 가벼움 중 어느 쪽이 진짜 삶에 더 가까운가 하는 질문이었다는 거다.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 물음이 소설 초반에 나오는데, 처음엔 그냥 철학적인 질문 정도로 읽었다. 근데 토마시와 테레자를 지켜보면서 이 질문이 얼마나 절박한 건지 알게 됐다. 토마시는 아무런 짐도 지지 않은 채 가볍게 살아가려 하지만, 그 가벼움 때문에 자기 존재가 점점 반쯤만 현실적인 것으로 흩어진다. 반대로 테레자는 무거움을 짊어지고서라도 사랑을, 삶을 진짜로 느끼고 싶어 한다. 근데 그 무게가 그녀를 짓누르는 고통이 되기도 한다. 결국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사는 건데, 어느 쪽도 완전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 소설의 냉정한 지점이었다.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이 문장 뒤에 토마시가 되뇌는 독일 속담이 나온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구절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늘 지금의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두려워하면서 신중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근데 정작 우리 삶에는 연습이라는 게 없다. 이번 생이 처음이자 마지막 본편이고, 그러니 우리가 매번 내리는 선택은 다시 고쳐 쓸 수 없는 최종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삶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어야 한다. 근데 저 속담은 정반대로 말한다. 한 번뿐이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 무게도 갖지 못한다고. 비교할 다른 삶이 없으니, 이 선택이 옳았는지 그른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는 거다.

처음엔 이 두 생각이 서로 부딪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고쳐 쓸 수 없다는 사실이 무게를 만드는 동시에,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사실이 그 무게를 다시 지워버리는 거니까. 근데 계속 곱씹다 보니 이 둘이 서로 다른 얘기가 아니라, 우리 삶이 단 한 번뿐이라는 같은 사실을 각자 다른 방향에서 보고 있을 뿐이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건 그 사실을 앞에서 본 거고, 비교할 수 없다는 건 뒤에서 본 거였다. 결국 하나의 사실이 보는 각도에 따라 무게로도, 가벼움으로도 다르게 읽히는 거였던 거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삶의 무게라는 게 애초에 삶 자체에 붙어 있는 속성이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우리 시선에 달려 있다는 거였다. 같은 선택, 같은 하루를 두고도 어떤 날은 다시는 안 올 소중한 순간처럼 무겁게 느껴지고, 어떤 날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먼지처럼 가볍게 흩어진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게 사건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 순간에 얼마나 시선을 두느냐라는 걸, 이 소설을 읽고 나서야 제대로 실감했다. 그러니 삶이 무겁냐 가볍냐를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살려고 애쓰기보다, 지금 내가 이 순간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를 자주 돌아보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싶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살면서 내렸던 선택들을 다시 떠올려봤다. 어떤 선택 앞에서는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끝까지 알 수 없다는 게 늘 불안했다. 근데 생각해보면 애초에 비교할 대상 자체가 없었다. 그 선택을 하지 않았을 때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 지금 이 선택이 옳았는지는 사실 영원히 증명할 방법이 없는 거였다. 처음엔 이게 허무하게 느껴졌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정답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매번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를 끝없이 검증하려던 그 강박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토마시처럼 아무 무게도 없이 가볍게 흘러가는 삶도, 테레자처럼 모든 걸 무겁게 짊어지는 삶도 다 나름의 방식으로 진실했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삶인지는 소설이 끝나도록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엔 이 소설이 나한테 아무 결론도 안 주는 것 같아 답답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오히려 정직한 태도였던 것 같다. 애초에 하나의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결국 중요한 건 무거움과 가벼움 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지금 택하고 있는 삶의 무게를 얼마나 정직하게 짊어지고 살아가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살기로 했으면 그 가벼움을 끝까지 회피 없이 마주하고, 무겁게 살기로 했으면 그 무게 앞에서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 답을 찾는 대신, 나는 대신 이 철학 하나를 오래 품고 살아가게 될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민음사 펴냄

5시간 전
0
이수민(상태:카뮈)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수민(상태:카뮈)

@smlee682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사진을 처음 봤을 때는 사실 별거 없어 보였다. 그냥 까만 배경에 희미한 점 하나. 그런데 이게 1990년,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기 직전 60억 킬로미터 밖에서 뒤를 돌아 찍은 지구 사진이라는 걸 알고 나서 다시 보니까, 그 별거 없어 보이던 점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지구가 겨우 0.12화소, 그러니까 사진 전체에서 먼지 한 톨보다도 작은 크기로 찍혀 있었다.

세이건이 이 사진을 굳이 찍자고 밀어붙인 이유가 인상적이었다. 처음엔 과학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는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카메라를 돌리는 것 자체가 태양빛 때문에 렌즈에 손상을 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근데 세이건은 그럼에도 이 사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주 속에서 인류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거였다. 그 판단이 지금 보면 정말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진 한 장이 그 어떤 논문이나 통계보다도 더 강력하게 인간의 위치를 실감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 점 하나가 우리한테는 전부라는 사실도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우주 전체로 보면 먼지만도 못한 크기지만, 우리한테는 갈 곳도 대안도 없는 유일한 자리인 거다. 이 두 가지를 같이 놓고 보니까 단순히 허무하다는 감정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게 이거 하나뿐이라는 걸 실감하고 나니, 오히려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고 함부로 대했던 것들, 서로한테 쏟았던 다툼이나 무심함 같은 게 새삼 아깝게 느껴졌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요즘 내가 매달리고 있는 크고 작은 걱정들을 다시 떠올려봤다. 누군가와의 갈등, 잘 안 풀리는 일들,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은 불안. 이런 것들이 실제로는 이 우주적 스케일에서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크기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정작 그 순간엔 세상에서 제일 큰일처럼 느껴진다. 한숨도 안 자고 밤새 뒤척이게 만드는 일들이 사실은 저 먼지 한 톨 위, 그 안에서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한 점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새삼 우습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이럴수록 가끔은 이렇게 시야를 크게 확대해서 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의 걱정에 파묻혀 있다가도, 이 창백한 푸른 점 위에서 다들 비슷한 크기의 걱정을 안고 각자의 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는 걸 떠올리면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내 고민이 별거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나만큼이나 절박하게 뭔가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되는 거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동시에, 이 작은 점 위에서 우리가 왜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해야 하는지도 더 선명하게 만들어줬다. 우리가 가진 게 결국 이 점 하나뿐이고, 그 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다 나처럼 작고 연약한 존재라면, 서로한테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 것 말고 달리 뭘 더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다 같이 이 먼지 한 톨 위에 잠깐 머물다 가는 거라면, 그 잠깐의 시간을 서로 할퀴며 보낼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창백한 푸른 점

칼 세이건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1일 전
0
이수민(상태:카뮈)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수민(상태:카뮈)

@smlee682

행복한 죽음은 카뮈가 죽고 나서 11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나온 소설이다. 원래 이방인을 쓰기 전인 1936년에서 38년 사이에 써놓고 서랍에 묻어뒀던 원고인데, 실제로 이 안에서 이방인의 원형을 그대로 볼 수 있어서 카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안 읽을 수 없는 책이었다. 주인공 이름부터가 파트리스 메르소인데, 바다를 뜻하는 메르와 태양을 뜻하는 솔레이를 합성해서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름이 훗날 이방인의 뫼르소로 이어진다는 걸 알고 나니,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치 카뮈라는 작가가 태어나기 직전의 어떤 원석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소설은 정말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메르소는 화창하지만 서늘한 4월의 어느 오전, 자그뢰스라는 남자의 별장을 찾아가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그를 총으로 쏴 죽인다. 그리고 자그뢰스가 미리 써둔 유서 형식의 편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기 지문이 묻은 총을 닦아 시신의 손에 쥐여준 뒤 돈다발을 가방에 쑤셔 넣고 유유히 그 집을 빠져나온다.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자그뢰스는 사실 메르소가 알고 지내던 여자 마르트의 첫사랑이었고, 메르소는 그를 통해 소개받은 사이였다. 이 살인 장면을 읽으면서 이방인의 그 유명한 총격 장면이 자연스럽게 겹쳐 보였다. 근데 이방인의 살인이 태양 아래서 벌어진 우발적이고 거의 무의미한 사건이었다면, 여기 메르소의 살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계획된 것이었다. 그 차이가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뫼르소가 부조리 앞에서 그냥 떠밀리듯 살인자가 된 인물이라면, 메르소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스스로 살인을 선택한 인물이었다.

소설은 크게 자연적인 죽음과 의식적인 죽음, 두 부로 나뉘어 있다. 살인을 저지른 뒤에야 메르소의 삶에 대한 의식이 서서히 깨어난다는 구조가 이 소설의 핵심이었다. 그는 그 돈으로 자유를 사고, 세상 앞의 집이라는 곳에서 지내면서 비로소 삶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문장이 있는데, 메르소가 눈물과 태양의 얼굴을 한 삶, 소금과 뜨거운 돌 속에 담긴 그 삶을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은 힘이 솟구쳐 오르는 걸 느끼는 대목이었다. 사랑과 절망이 서로 뒤섞여서 하나가 되는 것 같았다는 그 묘사가, 나중에 결혼·여름에서 만나게 될 카뮈 특유의 태양과 바다에 대한 예찬이 이미 여기서 싹트고 있었다는 걸 보여줬다.

이 소설이 던졌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행복이라는 게 정말 살인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거였다. 카뮈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메르소는 행복을 찾아 떠나지만 결국 죽음이라는 운명과 마주하게 되고, 그 죽음 앞에서도 그는 후회보다는 어떤 충만함을 느낀다. 처음 이 결말을 읽었을 때는 좀 불편했다. 살인으로 얻은 자유와 행복을 그렇게 긍정해도 되는 걸까 싶어서. 시지프 신화가 부조리에 대한 답으로 반항과 자유와 열정을 논리적으로 제시했다면, 행복한 죽음은 그 답에 도달하기 전 카뮈가 훨씬 더 날것으로 던져본 실험 같았다. 만약 행복이 자유를 필요로 하고, 그 자유가 결국 시간과 돈이라는 물리적 조건에 묶여 있다면, 그 조건을 강제로 빼앗아서라도 자유를 손에 넣는 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메르소는 그 질문에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대답한 인물이었다. 물론 카뮈는 이후 반항하는 인간에서 어떤 대의로도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을 긋는다. 그러니 이 초기작의 메르소는 카뮈가 옹호한 인물이라기보다, 그가 나중에 도달하게 될 윤리 이전에 스스로에게 던져본 가장 위험한 가설에 더 가까웠던 셈이다.

그런데 그 가설의 핵심, 그러니까 행복해지려면 결국 시간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그 전제만큼은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메르소가 자유를 얻기 위해 택한 방법은 끔찍했지만, 그가 자유를 갈망했던 이유 자체는 아주 소박했다. 그냥 시간에 쫓기지 않고 삶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던 것뿐이다. 나도 평소에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흘려보내다가, 어쩌다 하루 여유가 생기면 그제야 계절이 바뀐 걸 알아차리거나 오랜만에 하늘을 제대로 올려다보는 경험을 한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행복이라는 게 별게 아니라 결국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는 여유, 그 시간 자체가 행복의 재료였구나 싶을 때가 있다. 메르소는 그 시간을 얻기 위해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지만, 그가 그토록 원했던 게 결국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무심하게 흘려보내지 않는 하루였다는 게 오히려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부조리라는 게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어긋남에서 온다면, 메르소는 그 침묵에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균열을 낸 셈이다. 자기 손으로 타인의 생을 끊어버리는 순간,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의 생이 처음으로 선명해진다. 나는 물론 그렇게 극단적인 방식을 택할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지만, 이 지점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됐다. 나는 지금 얼마나 자각하며 살고 있는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시지프가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며 느끼는 벅참도, 결혼과 여름 속 카뮈가 태양과 바다 앞에서 느낀 충만함도, 결국 다 이 초기작에서 메르소가 폭력적으로 얻어낸 그 자각의 감각을 훨씬 윤리적이고 정제된 방식으로 다시 찾아낸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나도 굳이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고도, 지금 내가 가진 시간 안에서 조금 더 자주 멈춰 서서 그 순간을 자각하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보면 행복한 죽음은 카뮈가 평생 붙잡았던 질문인, 어떻게 살아야 부조리 앞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가 의 가장 위태로운 첫 번째 답안지였던 거 같다

행복한 죽음

알베르 카뮈 지음
올리버 펴냄

3일 전
0

이수민(상태:카뮈)님의 게시물이 더 궁금하다면?

게시물 더보기
웹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