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이 약하다는 말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김민섭 작가는 조용히 다른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를 읽는 동안, 나는 자꾸만 누군가의 잘됨을 진심으로 바랐던 적이 있었는지 헤아리게 되었다. 각자도생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사회 속에서 작가는 대리운전 기사로, 서점 주인으로, 출판사 대표로 살아가며 마주친 장면들을 적는다. 편법으로 사람을 내보내는 대학, 비정규직의 죽음에 무심한 사업장, MZ라는 이름 아래 묶여 버린 청년들. 그 풍경들은 낯설지 않다. 그런데 김민섭 작가의 시선은 그 풍경 앞에서 차갑게 굳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연결의 가능성을 가만히 응시한다.
인상 깊었던 건 ‘김민섭 씨 찾기 프로젝트’의 후일담이었다. 한 번의 선한 선택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로 이어지고, 다시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흘러가는지. 그 흐름이 거창하지 않아서 더 선명했다. 대단한 결단이 아니라, 일상의 서명 속에 추모 리본을 그리는 습관처럼, 반복되는 작은 태도들이 한 사람의 방향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
다정함은 동정에서 시작되지만, 그 범위를 조금씩 넓혀 가는 일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나와 상관없는 타인에게서 나를,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상하는 일. 그 상상이 행동을 부르고, 그 행동이 다시 누군가의 선택이 되어 돌아오는 순환. 이 책은 그 순환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믿지 않아도 된다고, 그래도 한 번은 시도해 볼 수 있지 않느냐고.
읽는 내내 나는 내 안의 계산기를 의식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도울 때 먼저 손익을 따지는 습관, 친절을 약점으로 여기는 눈빛들. 그 모든 것들 앞에서 김민섭 작가는 단호하지 않다. 다만 다정함이 가치의 영역이 아니라 지능의 영역이 될 수도 있다고, 차분히 제안할 뿐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는 문장이 한동안 귓가에 남아 있었다. 시기 없이, 계산 없이, 그저 그 말을 건네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그런데도 작가는 그 어려운 일을 계속하자고 말한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
김민섭 지음
어크로스 펴냄
1
돌보는 사람을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읽으면서 자꾸만 손끝으로 느껴졌다.
김유담 작가의 『돌보는 마음』은 그 사실을 큰 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다만 손과 발과 등이 먼저 알고 있는 무게를, 아주 가까이에서 보여준다.
복직을 앞둔 여자가 아이를 맡길 사람을 고르는 장면이 특히 오래 남았다. 비용과 경력과 성실함을 따지면서도, 결국 마음까지 함께 달라고 은근히 바라는 그 복잡한 계산. 돈을 주고 사는 노동인데도 가족 같은 애정을 기대하게 되는 순간. 그 기대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동시에 얼마나 절실한지 소설은 판단하지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함께 서 있게 한다.
산후조리원에서 젖이 잘 나오기를 기도하는 밤들, 치매 걸린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두고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노년의 여자들, 결혼 후에도 결국 집안의 모든 것을 떠맡게 되는 사람들. 그들의 하루는 특별하지 않다. 특별하지 않아서 더 아프다. 누군가를 챙기는 일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다시 자신의 삶을 밀어내는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상 깊었던 건 돌봄 안에 섞여 있는 여러 감정들이다. 애정만 있는 것도 아니고, 원망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질투와 피로와 미안함이 한꺼번에 섞여서 흐른다. 작가는 그 섞임을 억지로 정리하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두어도,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담담히 보여준다.
읽는 동안 문득 내 주변의 손들이 떠올랐다. 밥상을 차리고, 약을 챙기고, 전화를 받고, 무언가를 대신 참아주는 손들. 그 손들이 하루가 끝나면 어디에 가서 쉬는지를 나는 제대로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질문이 생겨났지만, 답을 구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 질문이 조금 더 오래 남아 있기를 바랐다.
돌보는 마음이 숭고한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 마음이 누군가를 살리는 동시에, 돌보는 사람을 조금씩 닳게 하기도 하니까. 김유담 작가는 그 양면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위로보다는 인식에 가깝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들을, 조용히 다시 보여준다.
2
아버지가 나무로 되살아났다. 남자친구의 오른손이 브로콜리가 되었다. 죽은 남자친구가 손톱에 빙의해 나타났다. 이렇게 나열하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인데, 읽다 보니 전혀 황당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이유리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는 환상과 현실이 밀착되어 있었다. 경계가 흐릿했다. 소설 속 인물들은 기이한 사건 앞에서 그리 놀라지 않았다. 잠시 멈칫하다가도 금세 별일 아니라는 듯 대처했다. 식물로 되살아난 아버지에게 툴툴거리면서도 번번이 바람을 들어주는 유진처럼, 돌과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말하는 이구아나에게 수영을 가르쳐주는 강사처럼. 그들은 담담했고, 그 담담함이 나를 설득했다.
그런데 이 소설들이 단순히 유쾌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복합적인 맛이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단맛과 쓴맛이 뒤섞였고, 기이함 속에 따뜻함이 얼핏 스쳤다. 인물들이 경험하는 기묘한 현상들은 억눌리고 지연된 감정을 가시화한 것처럼 보였다. 마음속 힘듦을 숨긴 채 오래 살아가다가 견디다 못해 생겨나는 암덩어리처럼.
복싱 선수 원준의 오른손이 브로콜리가 된 이유는 밉지도 않은 사람을 억지로 미워하려 애썼기 때문이었다. 학교폭력을 당하던 과거에 괴롭힘이 아무 타격도 주지 않는다고 자신조차 속이며 버티던 순간, 돌과 말하는 능력이 생겼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두고 간 이구아나에게 “야, 우린 버림받았다, 그 쓰레기한테”라고 말하는 이의 푹 꺼진 눈두덩은 이구아나와 닮아 있었다. 억지로 삼킨 괴로움들이 결국 어느 날 아침 별안간 브로콜리가 되어버리는 것. 그런 식으로 마음의 매듭은 형체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 매듭을 풀어주는 건 우연에 가까운 관계들이었다. 혈연처럼 끈끈하지 않은, 헐거운 공동체. 같이 버림받은 이구아나, 할머니와 할아버지, 죽은 남자친구의 유령과 함께 찌개를 끓여 먹는 시간. 왜가리의 사냥을 함께 구경한 동네 주민 네 명. 그런 사람들과 보낸 시간이 맺힌 마음을 풀어냈다. 함께 밥을 먹고, 산 위에서 소리를 지르고, 별것도 아닌 일에 깔깔 웃는 것. 그런 게 필요했던 거였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살다 보면 꼭 있다는 걸, 이 소설들은 알고 있었다. 조금만 스쳐도 멍이 드는 우리 인간이 실패와 상처를 말끔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아직 요원하다는 것도. 그래도 성공과 실패를 같은 무게로 여기는 왜가리를 부러워하며 함께 웃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그런 기묘한 평안함이 페이지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있었다.
일상에 불쑥 침범하는 초자연적 사건들,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세계, 억눌린 감정이 형체를 갖추는 순간들. 그 모든 것이 이상하면서도 다정했다. 이유리 유니버스라는 이 세계는 물음표와 느낌표로 가득했지만, 그 안에서 나는 묘하게도 편안함을 느꼈다. 누구에게나 이런 브로콜리 같은 게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덜 외로웠다.
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지은이)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5
올곧은그림책
어제는 너무 아쉽게 엇갈렸지만… 보고 싶다는 제 진심만큼은 모형 작두가 아니라 찐 '혼모노'였습니다… 비록 어제 타이밍은 빗나갔어도 다음주에는 작두 탈 기세로 고집을 부려서라도 반드시 꼭 만나고 말겠어요!!
4일 전